나는 너에게 술을 건네고 싶다
상태바
나는 너에게 술을 건네고 싶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29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4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황지우

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1-5)

갈릴래아 땅, 카나

우리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을 본다. 유다인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는 카나라고 불리는 갈릴래아의 마을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이 마을은 티베리아스에서 하룻밤에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곳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다. 케푸르 켄나 · 카나트 엘케릴 · 아인 카나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그것인데, 이 마을은 모두 티베리아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카나가 어느 마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이 유다가 아닌 갈릴래아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요한 2,1 참조).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땅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났지만, 그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알려주는 기적을 갈릴래아에서 보이셨던 것이다. 각박한 갈릴래아 소작인들의 땅이며 죄인들의 터전이었던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고향이면서 복음이 선포되는 첫 자리요, 하느님 나라 운동의 못자리였다.

 

네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렴

그리고 그 기적은 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났다. 한참 잔칫집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포도주가 동이 나버린 것이다. 이를 어찌할꼬.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얘야! 네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렴.” 하고 언질을 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미의 부탁이라 하여 단순히 잔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움직일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2,4)

예수님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실 분이 아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끌어모으고 기쁜 소식을 만방에 선포하기로 작정한 마당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아직 모든 게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적을 요청하는 첫 자리에서 망설였던 것일까. 그때에 어머니가 던진 신뢰에 가득찬 말 한마디가 그분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특별히 여성들에게 많은 배려와 애정어린 눈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던 요한은 비록 예수님 어머니의 이름을 단 한번도 밝히지 않았지만, 그 어머니를 구체적 사건 안에서 연거푸 등장시킨다(2,12; 6,42; 19,25). 어머니였던 한 여성이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을 이끌어 냈는데, 예수님이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이 기적,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사건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등장을 미리 보여주는 표징이 되었다.

하느님 나라, 가난한 이들의 혼인잔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즐겨 비유하곤 하셨다(마태 22,1-14; 25,1-13; 루가 12,36 참조). 이 잔치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부자들의 혼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자라면 당연히 축하객들이 마음껏 마시고 취하더라도 넘치고 남을 만한 포도주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잔칫집 주인들은 누구나 손님들로부터 “아, 그 집 잔치상 한번 떡 벌어지게 차렸더구먼. 대단한 집안이야!” 하는 감탄사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생기는 법이며, 부자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나에서 혼인을 치른 사람들에겐 그만한 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적어도 요한이 쓴 복음서에 나오는 혼인 잔치는 가난한 이들이 베푼 것이었으며, 그 부족한 것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채워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물을 피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칫 흥이 깨지기 쉬웠던 불완전한 잔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신다.

 

여섯 개 돌항아리에 담긴 새 포도주

이 집에는 정결예식 때 쓸 물을 담아두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 여기서 돌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섯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완전함을 뜻하는 일곱보다 하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숫자였다. 정결례는 그 예를 행하지 못하는 많은 천민들을 죄에 묶여 살도록 만드는 종교적 사슬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유다의 정결례는 유다인들을 참되게 하느님 앞에 서도록 도와 주지 못했다. 정결례는 사람들에게 위생관념을 심어주었고 몸을 깨끗하게 하도록 해주었지만 마음을 비우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함으로써 유다교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장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교와 아무 상관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려 들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먼저 일꾼들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돌항아리에 붓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 물을 퍼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는데, 그것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한다. 곧 대접에 담긴 ‘포도주로 변한 물’은 항아리에서 떠온 것이었다. 정결례가 상징하는 유다교에서 복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생명의 포도주인 ‘복음’이 세상과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게 해주고 완성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서 작가와 그 공동체가 살았던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가령 디오니소스 신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이를 발전시켜 필론은 구약의 대사제 멜키세덱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멜키세덱은 물 대신 술을 가져와서 마시게 하고 신적으로 취하게 된 자들이 깨어서 영혼의 맑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영혼들을 깨끗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신적 영감을 주는 멜키세덱을 로고스(Logos)라 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작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포도주를 따르는 자”로 이해하였으며, 그 포도주는 다름 아닌 ‘복음’을 뜻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비유를 통해 복음을 포도주에 빗대어 말한 바 있다(마르 2,22; 마태 9,17; 루가 5,37-38 참조).

전례에서 풍성한 포도주를 거두어

그 포도주가 풍성해지면, 곧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산에서는 햇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무르익은 곡식이 물결치리라. 내 백성 이스라엘의 국운을 이렇게 회복시켜 주면 저들은 쑥밭이 된 성읍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 살며, 제 손으로 심은 포도에서 술을 짜 마시고, 제 손으로 가꾼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게 되리라.”(아모 9,13-14; 호세 14,7; 예레 31,12 참조)

전례에서 우리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다. 더 나아가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성(聖)변화 시킨다. 물은 우리의 타성에 젖은 일상이며, 노동으로 지친 육체이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이며, 옛것만을 고집하는 우리의 생각이다. 여기에 생명을 주고, 운동하게 만들고, 미래를 열어 가도록 힘과 용기, 열정을 주는 것이 포도주이며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활력을 얻고 그리스도처럼 가난과 멸시에 굴복하지 않는 순교자적 정신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건빵에 우유 먹듯이 생뚱맞게 모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약 건빵과 우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전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도 하나의 성사(聖事)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난과 거기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맛볼 수 있다면.

그러나 신자들이 그 몸과 피의 뜻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전례를 행하는 사제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전례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봉사, 가난의 영성과 자신의 이익을 고집하는 자세를 버리는 겸손한 마음이 빠져버린 채 ‘한 주일도 무사히’... ‘경제적 넉넉함과 내 가정만의 안녕’이 기념되고 경축될 때 당연히 성체성사는 아무런 희생도 없이 값없이 치러지는 예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하여, 왜 그리고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었는지 반성해 볼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래야 예수님이 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포도주를 풍성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다정하신 주님,
저도 한 잔 당신께 드리고 싶군요.
내 가진 것 별로 없고
내 나눌 것 변변치 못하지만
거절 말고 사양 말고 술 한 잔에|
덕담이나 해주시면
얼마 좋을까요, 주님.

술김에 드린 말씀
허투루 듣지 않으시고
들켜버린 속내를 덮어두시는 주님,
제 마음 의지하고
제 살 길 열어주시는 하느님,
당신 앞에서 주도(酒道)를 배워
흠없는 당신 자녀 되게 하시고
당신께서 제게 주신 술잔에
기쁜 소식 가득 담아
남에게고 권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