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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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2.2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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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9

그동안 너무 느슨하게 살아왔던 탓일까 서울로 인천으로 오며가며 사람과 일을 찾아다닌 지 얼추 다섯 달이 되어 가는데, 일정과 약속을 빠짐없이 채우는 게 서툴다. 한꺼번에 여러 일을 동시에 치러내는 과정에서 실수도 많다.

그날 아침엔 권오광 선배에게 문자를 띄웠다.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그날은 가톨릭 노동사목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 선배와 더불어 함백까지 동행하기로 약속했던 날이었는데, 다른 일정이 생긴 것이다. 사실 약속 장소인 송내역으로 나간 것은 그 전날이었다. 날짜를 헛갈린 것이다.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함백에 갔다가 그 밤으로 서울로 되돌아오기로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다음날에는 다른 일정을 잡아두고 있었다. 날짜를 잘못 헤아려 빚어진 이중 약속 때문에 고심하다 당일 아침에 나는 노동사목 수련회를 포기하고, 다른 후배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미안해서 전화를 못하고 문자만 날렸건만, 선배에게서 결국 연락이 왔다. 안 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강원도 함백까지 어찌 가냐는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쯤 기대어 사는 법인데, 약속 취소를 전하는 문자를 보낼 때도 나 역시 그 점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장거리 여행엔 동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은 나보다 더 빡빡한 일정 때문에 항시 잠이 부족했고, 졸음 운전을 막기 위해 운전대를 잡으면 꼭 건오징어를 씹는다고 했다. 오징어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씹는 과정에서 잇몸에 자극을 주어 정신을 맑게 하고 졸음을 쫓아낸다는 선배의 졸음 퇴치 비법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선배는 함백에 들렀다가 다음날엔 곧바로 경주로 가서 일반노조 관련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 경주 우리집까지 자동차로 태워다 줄 수 있다는 거였다. 어차피 주말엔 경주 집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와 나의 동행은 좀더 길어질 예정이었다. 결국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다시 송내역으로 나갔다. 배낭을 메고 박카스 한 병 마시며 선배의 자동차가 역 주차장에 진입하는 걸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전날 송내역에서 오지 않을 선배를 기다리다가 처음엔 참 황당했다. 벌써 치매인가 어느 때는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었지만, 한 주일을 앞당겨 약속 장소로 나갔던 적도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더운 여름 땡볕 아래서 그 혼잡한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 장충동까지 걸었다. 물론 그 참에 동대문 시장에서 우리 딸 결이가 오매불망 간청하던 공주 옷을 사긴 했지만 말이다. 이럴 때 꿩 대신 닭이라고 하던가. 그렇다고 해서 내 불찰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내가 나를 다독거려 주어야 숨통이 열리겠지, 생각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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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송내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여유가 생기고, 이곳은 송내. 당장에 급할 게 없다는 생각에 만남을 미루어 두었던 김 신부님 생각이 났다. 버스로 한 정거장이면 인천 중앙병원이고, 원목실에는 지금도 이름만으로 호칭하게 되는 친숙한 선배가 있다. 김상식 신부님을 처음 대면한 것은 십수 년 전이었다.

당시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로 일하던 상식이형. 사제가 되고 싶어했던 상식이 형이 성공회신학대에 입학하면서 내가 후임으로 노동사목에 들어갔다. 그 후 상식이형은 예수성심전교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고, 필리핀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하고 마흔 줄을 훨씬 넘기고서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처음 형을 만났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때로는 연인처럼 속닥거리고 때로는 동지로서 가혹한 민중 현실에 대하여 함께 분통을 터뜨렸다. 헤어질 때는 언제나 초콜릿을 사 주었는데. 절기마다 카드를 보내고, 때마다 안부를 물어 주었던 형이다.

그러나 사제 생활의 고단함과 고독함 가운데 내게 타전을 보내곤 했던 신부님에게 나는 제대로 응답한 적이 별로 없었다. 연락을 취하자, 신부님은 나의 무심함에 대하여 타박하면서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나 역시 맘속으로 ‘미안해, 형. 내 인간성이 이것밖에 안 되네. 앞으로 그릇 좀 키워 볼게’ 하였다. 그날 정오에 있었던 미사의 주제는 때마침 ‘용서’였고, 이날 복음에서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어긋난 약속으로 다시 만나게 된 상식이 형, 내 게으름과 무심함을 용서하시오. 예수님도 오늘 그리 하라 이르시네요. 미사가 끝나고 우린 신부님의 숙소로 가서 보이차를 마시며 밀린 회포를 마저 풀어 놓았다.

나의 정신없음과 게으름과 무심함마저 좋은 곳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상에 파묻혀 돌아보지 못하던 사람의 무릎 앞에 나를 데려다 놓으시는 분이 그분이심을 깨닫는다. 다음날 몇 가지 소란을 겪고 출발한 함백행. 형은 휴게소에서 구한 오징어를 씹었고, 우린 구비구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주 나들목을 빠져나와선 제천, 영월, 정선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게 강원도는 낯이 설다. 여행을 다녀도 꼭 전라도 언저리만 훑어보았던 탓에 태백산맥을 제대로 쳐다볼 기회를 별로 얻지 못했다.

함백 성당, 갑자기 맥박이 조여 왔다. 사방에 산이 너무 높다. 무주 산골에서 살아 보았지만, 이렇게 골 깊고 산 높은 곳은 처음인 듯 싶다. 마당에서 물 한 컵 들이켜는데, 성당 앞산 높은 자락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예전엔 탄광에서 캐어낸 석탄을 싣고 달렸을 열차의 객실이 보인다. 벌써 어둑해지는 산골의 이른 저녁에 달리는 열차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묘한 그리움을 남기고 사라진다. 폐광이 늘면서 이 일대는 빈집 투성이다. 몇 남지 않은 주민들도 가서 머물 데만 있다면 삶이 막막하게 가로막힌 듯한 이 산골을 빠져나가고 싶을 것이다. 어린 시절 봉화에 살았다는 권오광 선배 말마따나 늘 떠날 것만 헤아리던 시절을 함백, 사북, 고한의 사람들은 지금도 겪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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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아이들이 시끌벅적했을 분교는 이제 우리 같은 방문객들의 향수만 자극할 뿐이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에 즐기던 딱지들, 왕자파스와 필통, 양철 도시락과 삐라와 신문 기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현재 진행형이 없이, 과거만 남아서 공단 골목 전신주에 달라붙어 팔랑거리던 구인광고 전단지처럼 그렇게 늙어가는 공간이 이런 광산촌이다. 함백 역사(驛舍)도 폐쇄된 지 오래되었다 한다. 태풍이 남부지방에 상륙한다더니, 이 밤에 바람 불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의 구절들 이 계절을 앞질러 달려온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가 스무 명 남짓하다는 함백 성당. 노동사목 식구들이 신입회원 환영식을 하고 밤새 술을 마시고 정담을 나누고 춤을 추는 와중에도, 다음날 파견미사를 할 때에도 성당 사목회장님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사람이 그리웠던 것일까 고갈된 젊음, 사라진 아이들이 다시 보고 싶다는 숨은 갈망 때문일까. 생애의 막장을 거닐던 그분은 오래간만에 ‘그리웠던 것을 호명하며’, 다음날 행장을 챙겨 떠나는 우리들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한줌의 눈물을 어딘가에 던져 주고 계실까

함백에서 경주로 가는 길. 봉화에서 길을 잃고 자동차로 비포장 산길을 두 시간 가까이 헤매고 난 뒤에야 동해로 접어드는 길목을 찾았다. 태풍의 기운 탓일까 비 오는 바다는 아득한 수평선에서 높게 치솟아 올라 거칠게 해변으로 파도를 밀어 보냈다. 밤잠을 설친 우리는 가다가 쉬고 가다가 잠시잠깐 잠을 청하곤 어렵사리 경주에 닿았다. 꿈인 듯싶다. 간단없이 해명할 수 없는 인생의 한끝을 만진 듯 아스라한 며칠이었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청명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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