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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 실천에 있어 주의집중의 중요성
메리하우스에서 ⓒ한상봉

여기 뉴욕의 가톨릭일꾼에서 선택하고 모일 수 있는 우리들 몇 사람은 매주 도로시 데이의 저술에 관해 토론하기 위하여 모인다. 그런데 모임은 자주 꽤 큰 그룹이 되어 10명에서 15명까지 함께 하고 그래서 나한테는 항상 결실이 크다. 모임은 도로시 데이가 일상 이야기를 말하고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같은 문제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함께 읽고 경험해보는 실제적인 도전이 된다. 그리고 우리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도로시 데이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 안에서 어떻게 살며 일하는지를 또한 그들의 매일의 체험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공명을 일으키는가 묘사하는 것을 듣는 것 역시 말로 다할 수 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의 토론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 그것은 애덕의 일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깨닫기 위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덕의 일은 전반적으로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이런 사실이 신체적 애덕활동에 있어서는 매우 분명한 것 같지만, 영적인 애덕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늘 어려움을 겪어왔다. 예를 들면,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과제는 나를 전율케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일을 도덕적 입장에 관해 일일 이 쉴사이 없이 잔소리하고 연단에 서서 주장하는 일이라고 잘못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애덕일이란 가장 어려운 자기실천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도로시 데이가 <빵과 물고기> 책에서 물음으로 던진 한 구절을 토론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한 신심에는 무언가 잘난 체하는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죄책감을 증가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의 신성함을 내세우려는. 다른 뺨을 내미는 것, 도둑이나 살인자 같은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은총 안에 성장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그런 경우라면, 나는 뺨을 맞는 사람이 되기보다 차라리 때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죄인을 대가로 지불하며 성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아니다, 어떻든 우리는 함께 구원되어야 한다.”

내가 천천히 배우고 있는 것은, 단지 이 토론그룹을 통해서만 아니라 <가톨릭일꾼> 신문을 편집하는 일에 더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배우는 것은, 영적인 애덕 일에서 “함께함”에 의해 도전받는 이 새로운 사고방식의 실천이다. 나는 ‘질문하기’라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이전에 내가 썼던 기술과 이야기-말하기에 관한 글을 통하여 나 자신에게 시도했던 습관이다.

영적인 애덕 일을 실천으로 여기는 것과 하나의 입장으로 여기는 것 사이의 차이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교실에서의 체험과 삶에서의 실험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글들에 관한 단상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교실(학교)는 이 실천과 입장 사이의 구분이 영적인 애덕에서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독특한 상황을 마련한다. 다음의 예들은 교실에서 연습하는 ‘주의집중’이라는 기능이 우리의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이 함께함을 창조해내는데 있어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의집중과 갈망

시몬 베유는 고통에 관하여 자신의 보통 잘 알려진 정치비평 저술들과 처음에는 매우 대조가 되는 한 글을 썼는데, “사랑이신 하느님의 관점으로 하는 학교 공부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베유가 친구인 앙리 페렝 신부의 부탁으로 가톨릭 학교의 소녀들을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 글에서 베유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 과목의 사용문제를 언급한다. 이런 과목들의 실용성이 후에 삶에서 무시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베이유는 이런 과목들의 내용이나 지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꽤 지루하고 진부 하게 여겨지는 이런 공부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력이나 실천에 더 주의를 쏟는다. 학교에서 이런 연습을 통하여 발달되는 주의집중이라는 기능은 시몬 베유의 주장에 의하면, 실제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일 때에 사용하는 집중력과 똑같은 능력이다.

시몬 베유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학교 공부는 역설적으로 보이고, 모순이 꽤 있지만, 우리가 올바른 노력을 할 수 있다면 언젠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학교 공부는 고통 중에 있는 어떤 사람이 구원되기 위하여 정확하게 필요한 도움을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사람이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시몬 베유 같은 사람에게 주의집중이란 소극적인 노력으로서 분투하기보다 그냥 바라보고 기다리는 행위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이 주의집중이라는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한 인간으로 보도록 해준다. 동정의 눈으로, 충동적인 반응으로, 혹은 따스한 마음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감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베유는 주장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주의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정해지는 범주에 따라 소위 불운한 사람들의 표본이나 집단의 한 부분 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로서 어느 날 어떤 연유에서건 고통을 받게 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학교 공부에 의해 발달된 주의집중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잔혹한 현실이라도 그 실재를 바라보게 하고, 그럼으로써 고통받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주의를 쏟는 기적을 향하여 우리를 열릴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은 주의집중이 실제적인 갈망의 표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애덕을 죄책감으로부터 행하는데 따라오는 위험은 단순히 솔직성이 부족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종류의 애덕실천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로시 데이는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민감한가에 대해 쓰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냄새나는 기분이나 취약점을 즉시 붙잡아낸다. 그리고 거기에 응답한다. 그런 순간에도 기본요구는 충족이 되지만, 참다운 환대의 정신은 주의집중에 의해 발생되는 연민, 함께함을 동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은 많은 측면에서 훨씬 더 쉬운 동기가 되고 있다. 여기 가톨릭일꾼에서의 우리 삶도 죄책감이라는 방식에 의해 꽤 쉽사리 끌려가는 유혹을 받고 있다.

시몬 베유는 학교 공부가 “너무나 귀중한 진주”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무거움이 아니라 단순한 우둔함으로부터(학교 공부의 연습에서 저질러지는 잘못된 계산 때문에) “겸손의 덕”을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 공부는 우리에게 정신의 명료함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현존하기 위한 주의력을 강화시켜 주기도 한다.

메리하우스에서 ⓒ한상봉

평등성이라는 가정

이제 나는 이 주의집중과 갈망이라는 생각을 교사의 관점에서 고려해 보고자 한다. 불란서의 정치철학자 자끄 랑시에르는 저술 <무지한 학교 선생; 지적능력의 해방에 관한 다섯가지 교훈>에서 자신의 사고와 조셉 자코토의 고문서에서 발견된 사상을 한데 엮고 있다. 자코토는 벨지움의 루벵에서 불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1818년부터 실험교육을 시도하였다.

짧게 정리하면, 조셉 자코토가 불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발견한 것은(자신도 플랑드르 말을 모르지만), 배움에 있어 설명이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배움이란 기본적으로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다. 조셉 자코토는 어떤 과목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자코토의 교사로서의 성공은(왜냐하면 그는 학생들과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말했던 “지적능력의 평등성,” 다시 말하자면 “지력의 발현에는 불평등이 있을 수 있지만... 지력의 역량 그 자체에는 계급이 없다.”는 진실을 보여 주었다.

독특한 교사로서의 위치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조셉 자코토는 이 지적인 능력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그것을 해방시키는 데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코토는 혹독한 교수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주의집중력을 이용하는 무지한 학교 교사의 모습을 창조했다. 책 (아무 책이나)을 자신과 학생 사이에(그렇게 하여 계급을 치워버리고) 두고 나서, 조셉 자코토는 학생에게 집중했다. 그가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은 학생이 책을 갖고 할 수 있는 지적 행위의 단순한 확인을 결코 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학생에게 청한 것은 다만 교재에서 충실하게 뽑아내어 만든 것을 보여주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설명은 단지 학생을 “바보 만들기”(항상 덜 아는 위치에 있고 따라서 교사에게 의존하는 상태)로 이끌 뿐이고, 주의집중은 학생 개인의 의지를 강화시켜 그가 교재로부터 원하는 것을 만들도록 해준다. 전통적 교육방식과 그 전환 사이의 차이(다름)은 조셉 자코토에 따르면,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길”이라는 뜻이다.

학생들을 시험하고 그들을 어떤 일정하고 미리 결정된 규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하는 폐쇄적이고 엄격하며 계급적인 “설명 받은 설명자들”의 체제가 가르침을 받은 특정한 분야의 사 고를 지배하고 있다. 지적인 해방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본 것을, 그것에 대하여 그가 생각하는 것을, 그것에서 그가 무엇을 그가 만들 것인가를 말하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한다. 열정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말하도록 한다.

이러한 조셉 자코토의 모습이 자크 랑시에르에게 마련해준 것은 평등성을 향하여 일하기보다(스승/제자의 관계) 이미 평등성의 가정 (해방)으로부터 일하는 사람이라는 중추적인 표본이었다. 정치철학의 분야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이와 똑같은 개념적 방향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어떻게 평등권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함축된 의미들을 드러낸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주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면, 그와 비슷하게 우리 경제의 울부짖음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크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도전은 함께함을 똑같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타인들을 우리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주의집중이란 이러한 외침들을 듣고 우리의 삶과 세상을 어떻게 공동으로 나누는가를 배우는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의집중이 잔인함과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측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믿는다.

작은 길

어느 날 이곳 매리하우스에서 진행하는 도로시 데이 토론 모임 중에, 조안은 삶에서 길들의 차이를 깨닫게 된 계기에 대해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었다. 그런 깨달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여성들 사이의 구분으로부터 왔다. 한 여성은 매리안 라이트 에들만으로, 아동보호기금을 만들었던 민권운동가이고, 또 다른 여성은 철도 지하운동의 지도자였던 해리에트 터브만이었다. 조안이 해리에트 터브만에게 더 끌리게 된 이유는 해리에트가 매리안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기관 대 지하운동 사이의 차이가 그 이유였다. 따라서 조안의 갈망은 가톨릭일꾼의 작은 길 테두리 안에서 행동적이 되는 것이다.

이 차이를 더 명료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곳 가톨릭일꾼에서 우리는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가 쓴 것처럼, 작은 길을 필연적이고 성사적인 일상의 실천이라고 여기며 거기에 집중하고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작은 똑같은 길이 도로시 데이가 실천했던 것처럼, 전쟁과 빈곤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배우게 된다. 여기에서 시몬 베유와 자크 랑시에르가 좋은 성적보다(결과보다), 교사가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보다(발전보다) 주의집중을 더 강조한 것은, 주의집중이 작은 길의 철저한 기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교 공부에 관한 위의 글에서, 시몬 베유는 이 주의집중의 교사만이 주인을 움직여 “노예 중의 노예가 되게 하고 노예를 사랑하게 하며” 그의 명령에 따르는 노예가 얼마나 소진되는가를 깨닫고 연민으로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자크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또다른 각도에서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어떤 정당이나 정부도, 어떤 군대나 학교나 기관도 단 하나의 사람을 해방시킬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방법에 의해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정부에 의해 보호받는 권리에 의존하는 것 사이의 차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우리 귀에 불편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권리라는 사상이 우리 문화 속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길은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이고, 시몬 베유가 “의무의 관념은 권리의 관념 이전에 오는 것으로, 권리는 의무에 종속되고 상대 적인 관념이다.”라고 쓴 것과 같다.

마르틴 루터 킹 박사가 비폭력 시민 불복종운동을 했던 이유가 단지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또한 그가 민권운동을 넘어 전쟁반대와 올바른 경제를 외쳤 던 것도 모든 사람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었겠는가? 1936년 선원들의 파업이 일어나 가톨릭일꾼이 그들을 위하여 스프를 끓이고 독서실을 마련했던 때 도로시 데이는 참으로 주의집중이라는 영적 애덕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시위 현장에서 돌아와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 했다. 그들은 읽고, 말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우리 가톨릭일꾼 본부는 선원들이 한 인간존재로서 동료들과 자유롭게 결합하고 협력하며, 관계하고 있는 기업운영에서 정당한 몫을 가지는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헌정이었다...”

보다 높은 도덕적 위치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퇴행하는 정신의 게으름에 양보하지 말자. 대신 온갖 복잡함을 지닌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고 확인해주는 주의집중의 기능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기술을 실험해 보자. 애덕의 일을 매일매일 실제로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개인의 책임에 근거한 사회적 구조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회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2010년 1~2월)

출처: <참사람되어> 2010.9.
원문출처: <The Catholic Worker> 2009년 8~9월, by 테드 워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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