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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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향하여
  • 방진선
  • 승인 2020.12.0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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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선종 18주년

경애하는 私淑의 스승 이반 일리치 신부님(Ivan Illich, 1926년 9월 4일 ~ 2002년 12월 2일)善終 18주년 

● 하느님 품안에서 지복직관의 놀라움을 오순 도순 나누실 세 분 스승님을 함께 기립니다 !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반 일리치와 그의 가장 친밀한 벗이었던 리 호이나키(Lee Hoinacki)입니다. 두 분도 다 가톨릭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일리치는 신부였고, 호이나키는 도미니코회 수사였죠.…"(김종철 선생, <머리 아닌 몸으로 아는 진실이 있다>, 가톨릭일꾼.2018.08.21)

"제 바램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놀라움을 체험하는 것입니다At the moment of death I hope to be surprised!"(이반 일리치)

● 코로나-19의 확산 위험에도 우리 사회가 내모는 출세•성공•특권 욕망의 1차 관문, <대입수학능력시험>에 들어서는 49만여명의 힘겨운 청춘들 

"…학교교육은 그것이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낸다고 하지만 실은 전체 사회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독특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12 년 또는 16 년 간의 학교교육 기간 중에 자기가 어떤 수준에서 탈락되었는지를 알고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 고등교육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어떤 가격표가 부착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다수 사람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이반 일리치와의 대담>녹색평론> 37호, 1997년 11-12월호)

"…대부분의 사람이 학교를 통하여 교육과 좋은 직업과 사회적 성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거나 점수를 제대로 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생동안 낙인이 찍혀지는 것이다. 잔인하기는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고등교육은 학문적 의욕을 고취하고 민주적 시민을 형성하기보다는 특권의 재생산에 더많이 겨냥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호기심을 죽이고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마릴린 스넬<상투성과 기계에 맞서는 현인> 녹색평론37호,1997년11-12월호)

● 우리 사회 각계 각층에서 달콤하고 꾀는 거짓말, 편가르기의 갈등과 다툼으로 부글 부글 끓고있는 이 매운 시대에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우정와 환대의 가르침 (<이반 일리치와의 대담>김종철 역, 녹색평론 37호, 1997년 11-12월호) !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팔레스타인 사람[사마리아사람]이 보여준 예가 무엇을 뜻하는지 느끼도록 우리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내 가슴속에 품을 것인지, 누구를 위해 나를 버릴 것인지, 누구와 얼굴을 맞대고 들여다 볼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듯한 눈길로 내가 사랑스럽게 더듬는 그 얼굴, 그로 말미암아 나 자신의 존재는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What I would have chosen … as our task is to awaken in us the sense of what this Palestinian, I say always instead of saying Samaritan, example meant. I can choose. I have to choose. I have to make my mind up whom I will take into my arms, to whom I will lose myself, whom I will treat as that vis-a-vis that face into which I look which I lovingly touch with my fingering gaze, from whom I accept being who I am as a gift."

☞ …최근에 쓴 책《텍스트의 포도밭》각주 53에 보면 12세기의 수도사였던 성(聖) 빅토르의 휴(Hugh of St. Victor)의 편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랑은 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죄인 휴로부터.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금방 그게 진실임을 알았었네. 그런데, 친애하는 형제여,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걸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잘 알게 되었다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었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은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혹은 내가 친구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나는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걸 사랑했으며 나는 그 사랑에 싫증난 적이 없었다네. 왜냐하면 그것은 내게 너무나 감미로왔고, 내 가슴을 가득 채웠으며, 나는 내 가슴이 그토록 조금밖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슬펐다네. 나는 거기 있는 것 전부를 취하지 못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취했었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내가 발견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다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그리고 이제 긴 여행끝에 나는 내 가슴이 여전히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 선물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일리치 :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지요.

"…To my dear brother Ronolfe from Hugh, a sinner. Love never ends. When I first heard this I knew it was true. But now, dearest brother, I have the personal experience of fully knowing that love never ends. For I was a foreigner. I met you in a strange land. But that land was not really strange for I found friends there." "But the land was not really strange for I found friends there. I don't know whether I first made friends or was made one, but I found love there and I loved it and I could not tire of it for it was sweet to me and I filled my heart with it and was sad that my heart could hold so little. I could not take in all that there was but I took in as much as I could. I filled up all the space I had but I could not fit in all I found so I accepted what I could and weighed down with this precious gift I didn't feel any burden because my full heart sustained me. And now having made a long journey I find my heart still warmed and none of the gift has been lost for love never ends.

Illich: It's so beautiful.…"

☞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절제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조심스러우며, 아취(雅趣)있는 우정을 가꾸는 것입니다. 나와 그대 사이의 우정, 그리고 제3의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지요. 간단히 말하여 한때 우리의 서구전통에서 우정이 정치의 최고단계의 꽃이었던 한, 오늘날 공동체적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벗을 사귀기를 원하는 사람 각자가 가꾸는 우정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합니다.…"Therefore my task is to cultivate disciplined, self-denying, careful, tasteful friendships. Mutual friendships always. I and you and I hope a third one, out of which perhaps community can grow. Because perhaps here we can find what the good is. To make it short, while once friendship in our western tradition was the supreme flower of politics I do think that if community life if it exists at all today it is in some way the consequence of friendship cultivated by each one who initiates it.

☞ 환대(歡待)라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의미에서의 공동체 삶, 즉 좋은 사회에 수반하는 조건인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공동체적 삶, 즉 올바른 의미의 정치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환대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는 문지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젼과 인터넷과 신문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아이디어가 안과 밖 사이의 벽을 붕괴시켜버렸고, 그와 더불어 누군가를 문지방 너머로 안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물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환대가 존재하려면 사람들이 그 둘레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곤해지면 거기서 잠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인사라든지 학력이 높은 고상한 사람이라든지 그러한 관념이 개입되는 곳에서는 환대는 깊이 훼손당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희망이 달려있는 한가지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환대라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지방과 테이블과 참을성, 그리고 귀기울여 듣는 습관을 회복하면서 환대의 관습을 부활하여, 거기로부터 덕성과 우정의 묘판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재생(再生)을 향하여 빛을 발산하게 될 희망 말입니다."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신자
Senex et Operarius Studens 窮究하는 늙은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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