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김용균 재단' 대표, 안전사회를 위해 투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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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 '김용균 재단' 대표, 안전사회를 위해 투쟁하다
  • 장영식
  • 승인 2020.09.16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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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인터뷰 내내 사건이 발생하면,“아픔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게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게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인터뷰 내내 사건이 발생하면,“아픔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게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게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사진=장영식)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열리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 투쟁 81일 차 아침. 마스크를 하였지만, 낯익은 얼굴이 있었습니다. 고 김용균 열사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였습니다. 김미숙 대표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김진숙 지도위원 곁에서 복직 투쟁 선전전을 함께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선전전 내내 무엇인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선전전이 끝난 후, 김진숙 지도위원은 어머니를 모시고 한진중공업 추모공원으로 안내했습니다. 추모공원에는 굴종과 침묵의 세월을 깨고 ‘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며, 한진중공업에 민주노조를 세우고 사수하는 과정에서 산화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비가 있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세 분의 열사에 대해 설명하고, 추모비에는 없는 최강서 열사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어머니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모습으로 김진숙 지도위원의 설명을 경청했습니다.

김미숙 대표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을 생각하면, 애절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은 어머니의 희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비록 어렵게 살았지만, 아들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김용균 열사는 아들이었지만, 애교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을 생각하며 “용균이는 엄마가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스스로 알아서 잘 컸어요.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받으며 책임감 있게 생활했지요. 회사에서도 똑같이 그랬을 것 같아요. 용균이는 경상도 남자였지만, 섬세한 마음이 가득해서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김용균 열사가 태안화력발전소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하고 좋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용균이가 이력서를 많이 넣었어요. 한전엘 가고 싶어 했는데,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결국 거길 들어갔어요. 자기가 원한 직장은 아니었지만, 경력을 쌓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곳엘 가기 위해서 갔어요.”라며 아들이 못다 이룬 꿈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김용균 열사의 죽음 이전과 이후는 어머니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이 죽기 전에는 “세상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살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산다고 회사와 집밖에 몰랐지만, 지금은 생각도 많이 깨우쳤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고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 이후 '김용균재단'을 설립하고, 아픈 이들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한국마사회 부경경마장소속 故 문중원 기수의 영결식에 참석한 어머니가 문중원 기수의 아내를 위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 이후 '김용균재단'을 설립하고, 아픈 이들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한국마사회 부경경마장소속 故 문중원 기수의 영결식에 참석한 어머니가 문중원 기수의 아내를 위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사진=장영식)

어머니는 억울하게 죽고 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프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왜 떠났을까”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아픈 것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노예처럼 일하게 만든 구조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안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픔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게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게 돌아보아야 한다”라고 역설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치고, 서로 싸움하게 만든 것은 사회적 구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김용균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김용균재단>은 상근자가 어머니를 포함해서 세 명입니다. 시민단체들과 연대해서 네트워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재단에 대해 “용균이의 투쟁은 끝이 아니라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연대하고,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죽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위험의 외주화 금지 등을 펼치고 있어요. 특히 용균이처럼 사고가 났을 때, 신속하게 유가족들을 찾아서 지원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고 김용균 열사의 죽음 이후 '죽음의 외주화'를 금지하라는 절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을 막기 위한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해서는 '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사진=장영식)
고 김용균 열사의 죽음 이후 '죽음의 외주화'를 금지하라는 절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을 막기 위한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해서는 '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사진=장영식)

어머니는 한국 사회에서 외면하고 있는 ‘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전에는 공부를 잘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이 많으면 나라가 발전한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머리로 외우는 것만 잘하고, 인성도 없고, 공부만 잘하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공익보다는 사익만 추구하고 있어요”라며 “사익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육도 변해야 하고, 세상도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전이 강화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머니는 국민들이 노동자에게 꼭 필요하고,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전태일 3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있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투쟁 선전전에 함께 하며 "꼭 만나뵙고 싶었다."라며 김진숙 지도위원의 35년의 꿈이 이루어지길 소망했습니다.
(사진=장영식)(사진=장영식)어머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투쟁 선전전에 함께 하며 "꼭 만나뵙고 싶었다."라며 김진숙 지도위원의 35년의 꿈이 이루어지길 소망했습니다.(사진=장영식)

어머니는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해 “얼마 전에 <소금꽃나무>라는 책을 읽고,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라며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투쟁에 항상 응원하고 싶고, 마음으로라도 무엇을 어떻게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그냥 마음이 쨘하고, 아픈 몸임에도 원하시는 복직이 꼭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길게 싸우기 위해선 잘 먹고, 자신의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며, 김진숙 지도위원도 자신의 몸을 잘 돌보면서 싸워나가기를 기원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헤어지면서도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내가 살아있을 때, 많은 것을 이루고 싶어요.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어요.”라면서 “해낼 거에요.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다 함께 하는 것이니까요.”라며 환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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