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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며, 애덕의 일은 충만해진다
ⓒ한상봉

초기 가톨릭일꾼 시절에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표현한 책 <빵과 물고기>에서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 어떤 법의 집행으로도 할 수 없고, 어떤 상식에 의해서도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저술이나 일보다도 <빵과 물고기>의 단조로운 구절들은 가톨릭일꾼운동이 실험적인 운동임을 최고로 모형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운동의 흥분과 두려움 그리고 시련을 묘사하면서 운동은 사회-정치적 상황에 무관심하고 냉담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긍정적으로 다른 것을, 너무나 오래되어 오히려 새롭게 보이는 것을 창조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애덕의 일을 “가장 직접적인 행동의 형태”라고 여기면서, 도로시 데이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휘둘리지 않으며, 제도적 기관들의 관료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이웃과 관계 맺기를 원했다. 법의 규칙에 의해 시행되는 이런 유형의 구조들 바깥에 있으면서, 애덕의 일은 마치 예술과 같은 유형의 훈련을 요구한다.

애덕의 일이 먹고 거처하고 보살핌을 받는 등등의 공통적인 필요 안에서 각 개인의 개별성을 주장하므로, 매일 일상을 바라보고 공동 참여함으로써 진행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일들을 손으로 하면서 배워간다. 그렇지만 도로시 데이는 사회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제가 도전이면서 또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도 진실한 길이 되기를 바랐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방식에 모욕을 준다. 현재 사회의 상식과 자주 반대가 되는 애덕의 영적 일들은 각자가 그들의 특정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부가 된다고 가르친다.

애덕의 영적인 일들에는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일, 죄인에게 권고하는 일, 실망하는 이들을 격려하는 일 그리고 의심을 품는 이들에게 조언하는 일이 포함된다. 최근에, 나는 이곳 매리하우스에서 살며 이야기(말하기)의 기능에 관해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다. 나는 매일 같이 이야기(말하기)가 일상의 생생한 부분이 되는 가톨릭일꾼집 같은 곳에서 전혀 살아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의 삶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점심 식사를 하러 오는 여성들은 다른 숙소시설에서 겪은 어려움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뉴욕시를 지나가다 하루이틀 밤을 묵고 가는 친구들이 말해주는 이야기도 듣는다. 나는 캐시가 요르단과 시리아에서 만난 이라크 사람들의 시련에 대해 말할 때 듣는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세계와 그 필요에 관한 나 자신의 그림을 색칠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이곳 매리하우스에서 이야기(말하기)가 명백하게 교육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집안일에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최상인가 자주 조언을 물을 때에, 나는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수년 전 일어났던 어떤 사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종류의 훈련에 공포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대했던 명료한 대답 없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훈련은 매리하우스에서 대면하는 문제들에 쉬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말하기)의 접근은 애덕의 일을 하는데 있어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쌓아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좋게 여겨진다. 이 글에서 나는 이야기(말하기)의 특별한 기능이 규칙 만들기 혹은 규칙 지키기와 다르고, 대안적인 방식과 직접 관계가 있으며, 본래적으로 저항적인 애덕의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종교재판소장이라는 등장인물의 효과적인 응답에 우려를 표현한 것, 그리고 발터 벤야민이 자신의 글 <이야기꾼>에서 뉴스 미디어에 관해 비판한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인격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다시 잡아주는 실천으로서 이야기(말하기)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들의 침묵

먼저 나는 법의 시행 문제에 관해 도로시가 앞서 했던 말과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을 쓰면서 경험했던 위기를 말하고자 한다.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가 너무 크다는 믿음으로부터 작업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종교재판소장을 이성적이고 무자비한 지도자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빵의 규제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종속시키고자 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참으로, 종교재판소장의 성실성은 의심하기가 어렵고 결점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데, 강제로 가해지는 평정만이 인류에게 참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할 때 그렇다.

종교재판소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자유, 자유의 이성, 그리고 과학은 사람들을 매우 당황스럽고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제멋대로 하고 사나워져서 자신들을 말소시킬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자유방종하고 허약해져서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 부류는 약하고 비열해져서 우리 발아래 기면서 울부짖을 것이다: ‘예, 당신이 옳았습니다. …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슬프게도, 역사는 이런 주장이 꽤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인류가 자유의지를 자주 오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소장이 자행하고 있는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오랫동안 침묵 속에 듣고 있던 예수는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부드러운 키스를 했을 뿐이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이어지는 부분은 조시마 신부의 삶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쉽사리 분명해지지는 않지만 종교재판소장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다. 공동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썼다,

“그 응답은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조시마 신부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죠. 만일 이것이 사 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난 좋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순수하고 이상적인 그리스도교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실제적이고 긍정적이며, 분명히 현존하는 것임을 인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종교재판소장의 무신론적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응답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추상으로부터 실재로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일어날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했다. 그는 이렇게 한 편지에서 설명한다. 

“나는 이야기(말하기)가 대답으로 충분한지 두렵고 떨린다. 이전에 표현된 주장에 직접적인 대답이 되지 못하고 빗나간 대답처럼 보여진다. 세상이 표현하는 방식하곤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이고, 조목조목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예술적 방식의 표현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를 걱정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받을 것이며, 내 목적을 조금이라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종교재판소장과 똑같은 논리 안에서 논쟁하기를 거부하며,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교를 일상생활 안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이야기(말하기)라는 방법을 취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을 추상으로부터 끌어내오기 위하여, 실천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야기(말하기)가 필수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자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이런 주장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런 접근은 전혀 주장 자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비논리적 사고방식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역사조차 현재 사회와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개인으로서 지고 있는 책임 보다 더 많은 개인적 책임을 자유가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입장이 그런 요구에 이성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을 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책임 을 실제로 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에 의지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야기(말하기)가 합리적 사고의 법칙에 반대하여 논쟁을 시도할 때에 비효과적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반세기 후 독일에서 살았으며, 나치를 피해 도망치면서 결국 깊은 절망 속에 자살한 발터 벤야민은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즉, 경험이란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1936년에 쓴 에세이 <이야기꾼>에서 발터 벤야민은 현대 우리의 정신 구조는 철저하게 이야기(말하기)의 기능과 반대라고 주장한다. 상식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수단인 이야기(말하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느리고 지나치게 특정한 사례에 그치기 때문이다.

발테 벤야민은 이야기(말하기)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뚜렷한 개요를 정리하기 위하여 이야기(말하기)와 뉴스 미디어를 나란히 놓고 있다. 벤자민은 말한다, “지금쯤은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야기-말하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정보를 알리는 데에 투자된다.”

사건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사건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실들과 숫자들을 찾아내고 그것에 의해 일련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야기(말하기)라는 방법은 우리 세계의 복잡함을 포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도 잊혀진 방식 같다. 아니면 더 최근에 보면, 이야기(말하기)는 정치분야에서 어떤 측정한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점 그리고 그 안 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의 문제이다.

정보에 기반하는 뉴스라는 매체와 반대로, 이야기-말하기는 매우 실천적인 체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방식에 의해 이야기-말하기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고(보통 사실과 숫자를 이용할 때와 달리 이야기를 통해서는 아무런 도식이나 전제를 얻을 수 없다), 다만 의견, 조언을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말하기)가 “조언을 준다”고 말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조언, 충고를 어떤 도덕적인 법칙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결국, 조언은 질문에 관한 대답이라기보다 펼쳐지는 과정 중에 있는 이야기의 계속에 관한 제안이다.”

발터 벤야민에게, 이야기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보존하고 집중시키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 그리고 또한 놀람과 성찰을 여전히 자극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문제를 다루는 일정 한 전통을,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을 전달하려고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도스토옙스키가 이야기-말하기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결함 (종교재판소장의 질문에 빈틈없이 대답하지 못 하는 무능력)은 실상 오늘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잠재력, 가장 위대한 힘인 것이다.

이야기(말하기)는 계속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경청자로서 우리의 과제는 이야기가 우리를 이성적으로 설득시키고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잘못 인도된 기대감을 갖고 듣는 것이 아니라(어떤 문제든지 간에 그것을 홍보하는 수단으로서 이야기를 이용하는 것), 이야기들을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 짜 넣을 것인가 그리고 실상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가를 배우기 위하여 듣는 것이다.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이러한 관계 맺기를 통하여, 이야기-말하기의 효과는 어떤 실질적인 응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사회관계에 있어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고 그것을 환기시키는 행동을 계속하는데 있다.

본질적인 실천들

이야기(말하기)가 합리화와 상식이라는 방식과 다르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애덕행위 안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특징을 발견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가 애덕 활동에서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우리 자신에게 묻고 있지 않는가? 실상, 위에서 인용한 도로시 데이의 글의 맥락도 바로 그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결핍, 무능력을 더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어떤 법으로도 집행될 수 없고, 어떤 상식으로도 성취될 수 없는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도로시 데이가 언급하고 있는 비판은, 가톨릭일꾼의 효율성,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애덕 행위가 우리의 모든 사회문제에 대답인가 아닌가에 관한 것이다. 애덕행위는 아마도 사회문제에 관한 답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불의에 대해 보통 “대답”이라고 제시하는 그런 방식의 대답은 아니다. 얼마나 자주 애덕행위 바깥에서는 이런 접근이 사회를 다르게 재건설하라는 요구라기보다 기존의 병든 사회를 누덕누덕 기우고 있는 단순한 실천에 불과한 것으로 쉽사리 혼동해서 보여지고 있는가.

사회 재건설은 오로지 애덕 행위를 스스로 실천해 가면서, 우리의 손과 우리의 마음으로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기꺼이 뚜렷해지고 드러난다. 법의 집행과 상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고방식과 마음의 자세를 물리치는 것이다(아무리 그런 자세가 작거나 마지막 단계라 해도).

애덕 행위는 종교재판소장의 합리지상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의 선함과 복잡함에 대한 인식과 인정 안에서 행해진다. 애덕 행위는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 임마누엘 무니에가 <인격주의> 책에서 썼듯이, “나는 단순히 나의 자발성을 실습해 보는 것으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오로지 이 자발성이 인간적 해방을 향하여 움직일 때에만–다시 말하자면 나 자신과 세상의 인격화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단순히 기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법과 상식에 대한 비판은 긍정적인 실천 안에서 본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자발적인 애덕행위를 실천하면서 그런 비판이 행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처음에는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이야기가 말하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자. 그리고 그런 행위에 의하여 우리의 일상 안에서 매일의 애덕행위 실천으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계속 전해가자.

출처: <참사람되어> 2010.9.
원문출처: <The Catholic Worker> 2009년 8~9월, by 테드 워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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