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 모든 시인은 예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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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 모든 시인은 예언자이다
  • 한상봉
  • 승인 2020.03.1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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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 안거든 그에게 온몸을 내맡겨라.
비록 그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하면 그 말을 신뢰하라.
비록 북풍이 정원을 폐허로 만들 듯 그 음성이 그대의 꿈을 뒤흔들지라도.”
(<예언자>, 칼릴 지브란)

로저 알러스 등 아홉 명의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Kahlil Gibran's The Prophet, 2014)을 보면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빠를 잃고 마음을 닫은 소녀 알미트라가 감금된 시인 무스타파와 친구가 되고, 마침내 무스타파가 풀려나 고향으로 떠나는 날, 그의 여정에 몰래 동행해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의 진리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스토리로 엮어져 있다. 무스타파는 결국 배에 오르지 못하고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처형된다.

Kahlil Gibran calligraphy print by Dave Woo
Kahlil Gibran calligraphy print by Dave Woo

하지만 칼릴 지브란이 1923년에 출판한 원작 <예언자>는 아주 단순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오르팔레즈 섬에 열두 해 동안 갇혀 있던 “선택받은 자이며 사랑받은 자” 알무스타파(Al-Mustafa)가 자신이 태어난 섬으로 데려갈 배를 타러 가면서, 삶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에 대해 주민들에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시작은 마을의 사원에 있는 여예언자 알미트라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중에서 사랑에 대한 답변은 <예언자> 전체를 미리 요약한다. 알무스타파는 “사랑할 때 그대는 ‘신이 내 가슴 속에 있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보다는 ‘나는 신의 가슴 속에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전하며 사랑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라고 조언한다. 거기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곡식단을 거두듯이 그대를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이고,
사랑은 그대를 타작해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그대를 키질해 껍질을 털어 버린다.
또한 사랑은 그대를 갈아 흰 가루로 만들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대를 반죽한다.
그런 다음 신의 신성한 잔치를 위한 신성한 빵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성스런 불꽃 위에 올려놓는다.”(<예언자>, 칼릴 지브란)

레바논의 거룩한 삼나무와 참혹한 가난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레바논 북쪽 비샤리(Bsharri) 마을에서 1883년 1월 6일에 태어났다. 마을 옆에는 레바논 산이 솟아있었다. 세무서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잘 생기고 매력있는 남자였지만 권위적이었으며,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날려버렸다. 어머니 카밀레 라메는 마론파 그리스도교 성직자의 딸이었으며, 사별하고 아들 부트로스를 데리고 재혼하여 아들 칼릴 지브란과 딸 마리안나, 술타나를 낳았다.

그녀는 독실한 신자였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미술과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특히 카밀레는 레바논의 동화 민담, 성경 이야기 등을 자식들에게 들려주었다. 칼리 지브란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 아랍어 작품인 <부러진 날개>를 보면 어머니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입술에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어머니’이고 가장 아름다운 부름은 ‘우리 엄마’이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달콤하고 다정한 단어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다. 슬플 때 위로가 되어 주고, 절망했을 때 희망이 되어 주며, 약할 때 힘이 되어 준다. 어머니는 사랑, 자비, 동정, 용서의 원천이다.”

마론파 그리스도교는 5세기에 시리아에 살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마론(Maron)이라는 은자와 같은 길을 걷기로 맹세하면서 생겨났다. 마론파는 예수가 쓰던 아람어로 진행되는 전례를 거행하며, 고산지대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 전통을 지킬 수 있었다. 칼릴 지브란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로 컸지만 아랍인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지브란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빠져들었다. 네 살이 되던 봄,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지브란은 땅에 구멍을 파고 종이 조각을 소중하게 파묻었다. 여름이 되면 거기서 종이가 많이 솟아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이가 떨어지면 지브란은 벽에 그림을 그렸다. 아홉 살 때 그는 부모와 함께 태양의 도시이며 바알신의 도시였던 바알벡(Baalbek)의 폐허를 구경했다.

거대한 유적지에서 지내던 어느 날 아침, 그는 폐허가 된 사원의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아 동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을 발견했다. 소년 지브란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인생을 보고 있단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것뿐이에요?” “그 이상 뭐가 필요하니?” 이 사건은 평생 지브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브란이 어려서부터 영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레바논의 장엄한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폭풍이 치면 산자락을 누비며 울부짖는 폭풍 속으로 뛰어다니곤 했다. 나중에 뉴욕의 엄청난 눈보라 속에서 지브란은 이렇게 썼다. “하찮은 걱정이나 고통으로부터 내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자연현상은 바로 폭풍이다. 폭풍은 항상 내 마 마음속 열정을 일깨운다.” 지브란이 가장 좋아하던 장소는 집 근처 산비탈에 자리 잡은 옛 수도원 마르 사르키스(Mar Sarkis)였다. 그곳에서 스케치를 하며 유난히 고독을 즐겼다. 그는 이런 고독과 예술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내 작품이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 속에 무언가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독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있거나 멀리 떠났을 때 나는 인간을 가장 사랑한다. 그때처럼 그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적은 없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있는 뭔가 야성적인 것을 길들이려고 손가락 끝이라도 대면 나는 마치 족쇄를 찬 듯한 기분이 된다.”

지브란은 삼나무 숲의 향기가 가득 찬 절벽과 골짜기와 숲속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와 침묵을 즐겼다. 그에게 자연은 신의 본성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열두 살까지 지낸 레바논의 고향마을은 칼린 지브란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삶은 가혹했다. 훗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현실을 이렇게 적었다.

“헐벗은 벌판에서
농부는 손톱으로 땅을 갈고
마음으로 씨를 뿌리고 눈물로 땅을 적신다.
그가 수확하는 것이라곤 가시와 덤불뿐이다.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텅 빈 들녘에서 헐벗고 굶주린 유목민은 맨발로 걷는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없다.
말하라! 자유의 여신이여, 우리를 이끌어 달라.
언제까지 우리는 성과 궁전을 짓고서도
움막과 동굴에서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우리는 곳간을 가득 채워 놓고도
마늘과 토끼풀만 먹어야 하나?”

 

보스턴 시절의 칼릴 지브란

보스턴 빈민가에서 그림을 그리다

1895년 지브란의 가족은 뉴욕을 거쳐 미국 보스턴의 빈민가 사우스 엔드(South End)에 짐을 풀었다. 여기서 어머니 카밀레는 낮에는 행상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 지브란의 아버지는 레바논에 남아 있었고, 장남인 부트로스가 미국에서 번 돈을 송금받아 연명하였다. 어머니가 보스턴의 고급주택가를 누비며 행상을 하는 동안, 지브란은 퀸시 공립학교에 다녔다.

지브란은 보스턴에서 보낸 2년을 불행했다고 기억한다. 빈곤한 살림에 이민자에 대한 편견, 백인 아이들의 횡포로 지브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큰형과 여동생인 마리안나와 술타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누이들은 어머니가 어렵사리 돈을 모아 차린 포목상 일을 돕고, 나중엔 의상실에서 일했다. 가족들은 지브란의 재능에 기대가 컸다.

한편 지브란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 본 미술교사 플로렌스 피어스의 도움을 받아 신비주의와 상징주의 사진을 찍는 홀랜드 데이(Fred Holand Day)를 만나게 된다. 데이는 사우스 엔드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론 새롭게 등장한 사진예술에 심취해 있었다. 지브란은 그녀의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이국적 취향의 데이는 이국적이며 꿈꾸는 듯 한 눈을 가진 지브란을 카메라의 힘을 빌어 ‘혈통 있는 귀족의 후예’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지브란은 영어 실력이 늘면서 영미 시인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키츠(John Keats)를 통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유일한 진리이며 가없는 하늘에서 춤추는 불꽃”이라고 느꼈다. 코플린 광장 도서관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회를 매주 보러 가던 지브란은, 거기서 얻은 영감을 끊임없이 화폭에 옮겼다. 지브란의 예술적 재능에 반한 데이는 코플랜드 앤 데이 출판사가 펴내는 책의 표지 디자인을 맡기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예술가와 예술애호가들의 세계에 진입한 지브란은 1898년 3월 8일 보스턴 카메라 클럽에서 주최한 사진전시회에 초대되었다. 데이가 찍은 지브란의 사진 7~8개가 전시되어 있었고, 이 자리에 왔던 24세의 여류 시인 조세핀 프레스턴 피바디(Josephine Preston Peabody)는 지브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진이 여기 걸려 있군요. ... 그런데 슬퍼 보이네요.”

조세핀이 슬픔이라고 해석한 것을 지브란의 가족들은 레바논에 대한 향수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머니 카밀레는 지브란이 보스턴의 보헤미안이 되기보다 레바논에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1898년 8월, 15세의 칼릴 지브란은 베이루트행 배에 몸을 실었다.

 

Fred Holland Day와  Peabody
Fred Holland Day와 Peabody

새는 사다리가 필요 없다

칼릴 지브란은 레바논에 돌아와 베이루트의 마론파 그리스도교 계열의 명문이었던 마드라사트 알 히크마(Madrasat-al-Hikmah)대학에 등록했다. 지도교수였던 유수프 하다드 신부는 지브란을 “급진적이고 반항적인 지성을 가진 예리하고도 활동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한다.

첫 만남에서 지브란은 하다드 신부에게 자신은 영어 공부를 마쳤으며, 레바논에 온 것은 “내 나라의 언어와 문학을 공부해서 이 언어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왔다”고 소개하면서, 자신을 초급반에 배치한 것은 부당하다고 불평했다. 하다드 신부는 배움이란 사다리 오르기와 같아서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지브란은 “새는 사다리가 필요 없이 날아오른다는 것을 선생님은 모르세요?”라고 반문했다. 과연 총명한 학생 지브란이 작문을 제출하기 시작하자 신부는 세심하게 작문 지도를 해주었다. 그때 지브란에게 규칙을 하나 정해 주었다. “깊이, 오래 생각하고, 적게 써라. 그렇게 하면 많은 것을 얻고 창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히크마 대학 시절에 지브란이 매력을 느낀 작가는 아디브 이샤크였다. 이샤크는 인간을 전통의 껍질을 벗고 본질로 돌아가는 선하고 자유롭고 너그러운 존재로 보았다. “재가 불씨를 덮고 있지만 끄지 못하는 것처럼” 그 본질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샤크는 인권과 자유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하여 인권을 박탈하고 불평등과 노예생활을 강요하는 사회의 폭력을 통렬히 비판했다.

한편 아비세나 같은 위대한 수피 시인들의 작품을 접하였으며, 낭만주의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면서, 번역판으로 접한 것이지만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의 <아탈라>,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의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당시 칼릴 지브란은 마르 사키스 수도원을 자주 방문해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위대한 화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벌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비샤리의 좋은 집으로 데려와 살고, 지금은 버려진 마르 사키스 수도원을 사서 자기 꿈의 안식처로 삼자고 마음먹었다.

예술계에 입문하다

그러나 5년 만에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온 칼릴 지브란에게 닥친 것은 가족들의 죽음이었다. 지브란이 귀국하기 직전에 막내 술타나가 결핵으로 죽었고, 얼마 후 동생 술타나가 결핵으로 죽고, 이듬해인 1903년 3년 형 부트로스가 폐병으로, 이어 6월에 어머니도 결핵으로 병원에서 죽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지브란은 엄청난 슬픔 앞에서 하나 남은 동생 마리안나까지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마리안나는 오빠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한 달에 60달러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삯바느질을 하고, 지브란에게 레바논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지브란은 어떻게 해서든 화가로 작가로 성공해야 했다. 마침 1898년 홀랜드 데이 사진전에서 만났던 시인 조세핀 피바디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를 통해 보스턴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살롱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The Vision by Khalil Gibran
The Vision by Khalil Gibran

조세핀의 살롱을 채운 우아한 분위기와 지브란이 사는 슬럼 사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가 있었다. 이 까마득한 심연을 지브란은 조세핀에게 선물하는 그림으로 채웠다. 유난히 추웠던 1903년 겨울, 지브란에게 조세핀은 빈민굴의 참을 수 없는 짐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달콤한 피난처였다. 조세핀은 이때 지브란을 “재로 가득 찬 마차에 매인 페가수스”라고 묘사했으나, 빈민가의 레바논 이민자들은 가족이 그 지경인데 사교계에 출입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지브란은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철길 건너편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예술가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란 사실을.

칼릴 지브란은 뉴욕 아랍이민자 신문인 <알 모하제르>에 아랍어 에세이를 쓰면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첫 글은 음식과 물이 없어 죽은 새가 들어 있는 새장을 그린 삽화가 들어간 <비전>이라는 글이었다. 말라버린 인간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새장과, 사람의 심장을 닮은 죽은 새는 아랍 이민자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나는 다수의 횡포가 자아내는 어둠 속에 갇힌 인간의 심장이다. 환상의 족쇄에 묶인 나는 죽음을 향해 밀려간다. 나는 문명의 변방에 동댕이쳐져 있다. 인간의 혀는 묶여 있고, 웃는 눈은 말라버렸다.”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를 단죄하다

지브란이 <알 모하제르>(Al Mohajer, 이민자)에 기고한 <마르타>, <미친 요한나>, <천년의 먼지와 영원한 불> 등은 아랍세계의 반목하는 종교의 합일을 부르짖고, 교회와 정부의 횡포를 두려움 없이 공격했다. 칼릴 지브란은 <마르타>에서 “자연이 인간의 스승이 되고, 인류가 책이 되며, 인생이 학교가 되는 날은 올 것인가?” 묻는다.

마르타는 레바논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에서 자란다. 보호자들이 그를 사정없이 착취하지만 마르타는 그 안에서도 자연이 주는 조화와 기쁨, 자유를 찾는다. 사춘기에 낯선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도시로 끌려가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지만, 임신하자 내쫓긴다. 그녀는 베이루트 뒷골목의 매춘부가 되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들 푸아르를 발견한다. 여기서 나레이터인 지브란은 이렇게 말한다.

“마르타, 당신은 학대당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억압한 사람은 궁정의 유력자의 아들입니다. 그는 부유하지만 영혼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학대받고 경멸당했습니다. 하지만 억압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억압당하는 편이 낫습니다. 강한 자, 인생의 꽃을 짓밟는 자, 욕망 때문에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을 추하게 만드는 자가 되기보다는 연약한 인간 본능의 희생자가 되는 편이 낫습니다. ... 아, 마르타, 당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의 발굽 아래 짓밟힌 한 송이 꽃입니다. 무거운 구둣발 아래 당신은 짓밟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부의 탄식과 고아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더불어 정의와 자비의 원천인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향기마저 부셔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미친 유한나>에서는 수도원에 소를 빼앗긴 가난한 목자 유한나는 무사가 칼집에서 칼을 뽑듯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며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이 책의 가르침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가? 위선자들이여, 당신들은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을 이용해서 악을 퍼뜨리고 있구나.”

이 때문에 수도원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유한나는 부활절에 열린 성당 건축 축하식에서 억압받는 자를 대표해 이렇게 말한다. “오 주여, 이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성당을 세웠고, 성전을 비단과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당신이 선택한 가난한 사람들을 추운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제단 앞에 향을 피우고 촛불을 컵니다.” 이후 유한나는 광인이 된다.

 

Life from [The Garden of the Propher]
Life from [The Garden of the Prophet]

파리에서 블레이크를 만나다

칼린 지브란에게 평생을 두고 친구이며 연인이며 후원자이며 편집자였던 사람은 메리 엘리자베스 하스켈(Mary Elizabeth Haskell)이었다. 하스켈은 보스턴의 하스켈 여학교의 교장이었는데, 지브란이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할 수 있도록 파리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190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원룸을 얻은 지브란은 아카데미 귈리엥에 등록했을 때의 설레임을 이렇게 적었다.

“라파엘, 미켈란제로, 다빈치를 구경할 수 있는 루브르 박물관 ... 베토벤, 바그너, 모차르트, 로시니가 대변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페라 ... 아랍어가 모국인 나로서는 이 사람들의 이름을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이들은 유럽문명의 초석을 놓은 위인들이다. 이들은 죽어 당에 묻혔지만 이들의 업적은 어디에 묻을 수도, 넣을 수도 없다.”

그러나 정작 파리에서 칼릴 지브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와 윌리엄 블레이크였다. 지브란은 “니체는 아마 19세기 인물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과거의 관습과 도덕적 편견을 무너뜨리는데 도움을 주었고, 특히 시인을 예언자라고 말한 니체에 공감했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시인이자 예언자인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니체는 제도화된 종교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니체가 종교를 완전히 부정한 것과 달리 지브란은 종교개혁을 꿈꾸었다.

지브란이 파리에서 만난 사람 “예술에서 내 형제이며, 신의 법칙 안에서 동업자”라고 불렀던 사람은 아민 리하니(Amin al-Rlhani)였다. 그는 아랍인 중에서 처음 영어로 시와 소설을 썼다. 그는 1911년 <칼리프의 책>을 쓰면서 지브란에게 삽화를 부탁했다. 그 영향으로 칼릴 지브란도 영어로 책을 쓰리라 결심했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에 리하니는 지브란과 후아익 셋이 런던에 가서 웅대한 계획을 짰다. 베이루트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화해를 상징하는 두 개의 돔을 가진 오페라하우스를 짓자는 꿈이었다. 반은 교회이고 반은 모스크인 이 건물은 결국 세워지지 못했지만, 이들의 뜻은 대단한 것이었다.

 

ancient of days by William Blake
ancient of days by William Blake

그러나 지브란에게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를 탐구하게 된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미리 정해진 조건이 아니라 충동과 창조성을, 과학 물질주의가 아니라 예언자적 비전을, 법이 아니라 영혼을, 억압적 도덕이 아니라 자유르르, 분열이 아니라 존재의 합일을,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더 큰 의식’을, 그리고 인간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었다. 이 만남은 지브란에게 신의 섭리였다. 지브란은 자유롭고 고결하고 행복하고 기이하고 놀라운 영혼을 블레이크에게서 발견했다.

예수에 대한 생각도 닮아 있었다. 블레이크는 정통교리가 설파하는 친절하고 겸손하며 정결한 예수를 ‘땅에서 기는 예수’라고 하면서, 그보다 더 열정적이고 반항적인 예수를 제시하였다. 블레이크는 율법을 거부하고,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찬양하며, 용서를 도덕률 위에 놓고, 성(sex)을 ‘영혼이 날개를 펴는’ 방법이라고 여긴 예수를 바라본다. 두 사람 모두 예수를 시인이며 예언자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1926년에 출간된 <모래와 물거품>에서 지브란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너무나 남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 사람을 어제 세 번이나 만났다. 처음에 그는 창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부랑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장사치와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첫 영어소설인 <광인>에서 지브란은 “알비온의 덮개에서 베이컨, 로크, 뉴턴을 털어 내고, 더러운 옷을 벗고 상상력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영감이 아닌 모든 것을 시로부터 떼어낸다”고 했다. 이는 “시인을 만드는 힘은 단 하나, 상상력”이라고 했던 블레이크를 따른 것이다. 블레이크는 “상상력이야말로 신의 눈”이라고 했으며, 시인의 임무는 “인간의 내면적 눈을 영원을 향해 열어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지브란은 시인은 영혼의 치유자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술을 가져다주는 예언자로 보았다. 그래서 “모든 시는 자서전이며, 모든 발견은 자아 발견이다. 우리는 빛을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며 만들어진 빛이다. 우리 는 위대한 빛의 원천에서 나온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와 지브란은 인간 심성의 깊은 곳을 탐색하고도 미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무의식에 압도된 니체와 달리, 이들은 신비스러운 고통과 창작 작업 사이에 균형을 유지할 줄 알았다.

 

Mary Haskell and Kahlil Gibran. Portrait and self-portrait by Gibran
Mary Haskell and Kahlil Gibran. Portrait and self-portrait by Gibran

영적 동반자, 메리 헤스켈

“당신이 원하는 걸 나도 원해요. 당신이 무엇이 되든 난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든지, 이런 것을 했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게 없어요. 난 당신의 앞날을 내다보는 건 원치 않아요. 다만 당신을 알고 싶어요.”(메리 하스켈)

“당신은 내게 문자 그대로 삶을 주었어요. 당신이 생명을 주지 않았으면 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실린 것처럼 살려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많아요. 단순히 돈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당신이 보내준 사랑, 누군가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자각, 이런 것들이 날 살린 거죠. 역사상 당신이 나한테 한 것만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 준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칼릴 지브란)

하스켈과 지브란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그들의 ‘영원한 관계’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타고난 교사였던 하스켈은 지브란의 영어를 고쳐 주었고, 지브란은 그녀 옆에서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의 시를 읽어주곤 하였다. 그들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평생 성관계를 자제했지만 키스와 애무만으로도 충분히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지브란은 <사랑하는 이>라는 소품에서 ‘첫 키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기쁨의 한숨과 달콤한 신음을 담고 산들바람이 장미꽃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며 지나간다. 혼란과 떨림으로 연인들은 물질세계를 떨어져 나와 영감과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스켈과 지브란의 관계는 1928년에 출간된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그려진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관계에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곁에 두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요. 나는 당신 자신을 사랑합니다.”

 

"The tears that you spill, the sorrowful, are sweeter than the laughter of snobs and the guffaws of scoffers."-Kahlil Gibran, "A Handful of Sand on the Shore"(Art: The Slave, 1920, by Khalil Gibran)
"The tears that you spill, the sorrowful, are sweeter than the laughter of snobs and the guffaws of scoffers."-Kahlil Gibran, "A Handful of Sand on the Shore"(Art: The Slave, 1920, by Khalil Gibran)

뉴욕에서 레바논 독립을 위해 일하다

인간 지브란보다 그의 동양적 분위기에 더 관심이 있는 보스턴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즈음에, 1911년 하스켈은 이를 알고 뉴욕에 그가 살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지브란은 힘에 넘치는 뉴욕을 금방 좋아하게 되었다. 지브란은 시리아인 사회와 다시 접촉하고 아민 리하니와도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해에 이탈리아가 터키에 선전포고를 하자 레바논이 터키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노예제>라는 산문시도 발표했다.

지브란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직 노예제가 존재한다고 비판했다. “노예제 때문에 인간은 독재자에게 덜미를 잡혀 있고 튼튼한 몸과 약한 정신은 탐욕의 아들에게 몸을 맡겨 도구로 이용당한다”고 했다. 1914년 3울 지브란은 아랍어로 <혁명의 시작>을 발표해 오토만 제국의 식민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여기서도 그는 다시금 레바논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연대하여 압제자를 쓰려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랑의 삶>에서는 종파를 넘어선 평화로운 공존을 희망했다.

“당신은 나의 형제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모스크에서 절을 하는 당신,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당신, 시나고그에서 기도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영혼이라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지 사이에서 내밀어진 머리들은 마치 신의 손가락처럼 모두 영혼의 완벽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브란은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를 지녔는데, 압제자들의 마음을 영성으로 정복하는 것만이 레바논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레바논의 인권을 계속 유린했다. 시리아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로 많은 반체제적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들이 추방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20년 4월 28일 뉴욕에 거주하는 시리아 작가들이 ‘알라비타’(연대)라는 단체를 조직해 아랍국가들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기로 결의했다. 회장을 맡은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 나는 시리아인들 틈에서 조국을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다. 아마 최상의 투쟁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것이리라. 그것이 내가 동포들이 투쟁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자신이 몸소 불타오르면서 다른 사람들도 타오를 수 있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치가 있다.”

인생 최고의 작품, <예언자>

1923년 9월 검은 표지의 2달러 25센트짜리 작은 책이 뉴욕 서점가에 선보였다. 칼릴 지브란이 20년에 걸쳐 공력을 기울여 지은 책 <예언자>였다. 하스켈이 먼저 이 책을 극찬하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칼릴, 오늘 <예언자>가 도착했어요. 솔직히 기대 이상이에요. ... 영어, 문체, 용어, 음률, 모두 정교해요. 칼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요. ... 이 책은 영문학의 보배로 간직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이 책을 펼쳐 보면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고, 우리 자신 안에서 하늘과 땅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예언자>는 성경의 언어를 사용했다. 지브란은 킹제임스 판 성경의 언어야말로 심오한 가르침을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 언어에 기대어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밤에 도시의 야경꾼들은 말한다, ‘아름다움은 새벽과 함께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노동자들과 나그네들은 말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황혼의 창에서 땅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눈 속에 갇힌 사람이 말한다, ‘아름다움은 봄과 더불어 언덕 위로 뛰어 오를 것이다.’
그리고 여름 열기 속에서 추수하는 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낙엽과 함께 춤추는 것을 보았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눈발이 흩날리는 것도 보았다.’”

 

칼릴 지브란과 [예언자]

주인공 알무스타파는 그리스도와 마호메트가 하나로 융합된 인물이며, 수피 전통에 나오는 ‘완전한 인간’의 화신이다. <예언자>는 기본적으로 신이 모든 사람 안에 ‘더 큰 자아’로 잠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생은 여행이고, 신은 출발점이자 목적지다. 알무스타파는 “당신들은 행렬을 지어 자신의 신적 자아를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는 문학성뿐 아니라 미술성도 뛰어나다. “미술은 자연에서 출발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이며, 안개가 형상으로 조각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던 칼릴 지브란은 이 책에 12점의 삽화를 직접 그려 넣었다. 지브란은 “미술은 나무에 열매가 매달린 모양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혼을 전달하는 것”이라 했다. 달리 표현하면 “미술의 사명은 가장 친근한 것으로부터 친근하지 않은 것을 끌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지브란은 <예언자>를 통해 가난과 질병과 학대로 얼룩진 ‘문명의 늙고 부패한 나무’의 뿌리를 공격했으며, 불가사의한 다양성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류는 하나의 영혼이 발현된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내적인 빛의 점화를 목표로 삼고, 각성된 인간이 ‘잠’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절망적인 현실을 살면서도, 지브란은 칭찬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좌절에서 구출하고자 바랐다. 그는 “완전한 예언자는 한 가지만 이야기 한다”고 했다. “당신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예언자>는 한 달만에 초판 1,300부가 팔렸으며,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혀 1957년에는 100만 부가 나갔고, 타고르의 <기탄잘리>(Gitanjali)와 비교되면서 2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칼릴 지브란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한편 이 책은 지브란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에서 지브란은 알무스타파로, 뉴욕은 오르팔레즈로, 메리 하스켈은 알미트라로, 레바논은 알무스타파가 태어난 섬으로, 그리고 알무스타파가 오르팔레즈에서 지낸 12년은 <예언자>가 출판되기 전 지브란이 뉴욕에서 보낸 12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브란 자신은 이 책을 출간하면서 심각한 내적 갈등을 빚었다. “말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실체는 일치해야 한다”는 수피 사상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브란은 <잠언집>에서 “내가 표현 속에 가두어 두었던 모든 생각은 행동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헤스켈과 <예언자> 교정작업을 하면서 몇 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내가 아니고 예언자예요.” 그는 “하느님도 아시지만, 나를 칭찬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프다”고 말했다. 지브란은 하스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와 시인의 차이점은 예언자는 자기가 가르치는 그대로 살지만, 시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근사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실렸던 그림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실렸던 그림들.

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를 출간하고 겨우 7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는 1924년 그리니치 빌리지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수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았으며, 신비에 쌓인 작가에 대한 상상력이 낳은 ‘지브란의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브란은 그런 명성과 상관없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음서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예수의 이야기였다. 그는 에르네스토 르낭(Joseph Ernest Renan, 1823-1892)의 <예수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읽고 “예수는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를 신이라 부르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그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지만 사람의 말에 비하면 너무나 완벽한 시이기 때문이다.”

1926년 11월에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를 쓰기 시작했다. 지브란이 그리스도의 독창성을 그리는데 영감을 준 사람은 압둘 바하(Abdul-Bahá, 1844-1921)였다. 압둘 바하는 바하이교 창시자의 아들로 40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08년 터키 혁명 당시에 석방되었다. 세계적인 종교-정치 지도자들에게 존경받던 압둘 바하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팔레스타인의 기근을 해결했다는 공로로 영국에서 기사 칭호를 받았다. 그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성 속의 합일’을 가르쳐 왔으며, 전쟁을 반대하고, 인류의 진보를 위해 먼저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날개가 힘의 균형을 이루지 않는 한 새는 날지 못할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위치에 이를 때까지 인류의 특별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인류는 진정 목표로 하는 높이까지 날갯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두 날개, 또는 두 부분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동일한 권리를 누릴 때, 인간은 아주 높이 날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며, 모든 불평등은 없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평등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인류의 진정한 진보와 목표 달성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브란이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상상해 낸 예수는 시적이며 비정통적이고, 역사적 정확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도 않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지도 않고 부활하지도 않는다. 그가 일으킨 기적은 자연현상의 결과이며, 그는 환생의 원리를 가르친다. 지브란은 그를 땅 위를 걸었던 다른 예언자들과 같은 맥락에 놓는다. “여러 번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여러 나라를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는 이방인 아니면 광인으로 취급받으셨습니다. ... 인도의 십자로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요? 아니면 동방박사들의 나라에서라도? 아니면 이집트의 사막에서?”라고 묻는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 우리들처럼 부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우리네 부모님처럼 평범했으니 그는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더욱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령이 예수께 임하셔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가 하프였다면 성령은 그 하프를 기가 막히게 타는 하느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복음서에 69번이나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지브란이 표지 그림으로 스케치한 예수의 얼굴은 깎아지른 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을 지녔으며, 두툼한 입과 단단한 턱, 단두대에 올라가도 끄떡없을 것 같은 목을 가졌다. 이건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 이미지와 아주 달랐다. 그는 예수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소심한 자들이 자신의 소심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를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또는 짓밟힌 자들이 그에게서 위안을 삼고 동료의식을 느끼기 위해서 예수를 마치 그들 옆에서 반짝 눈에 띄는 벌레처럼 생각하며 말할 때, 구역질이 나고 창자가 뒤틀린다. 정말 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넌더리가 난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분은 사냥개처럼 힘이 세고, 아무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태산같이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Towards the Infinite (Kamila Gibran mother of the artist) Poster Print by Kahlil Gibran
Towards the Infinite (Kamila Gibran mother of the artist) Poster Print by Kahlil Gibran

바다로 흘러간 예언자이며 시인

새로 수립된 레바논 공화국에서 1928년 칼릴 지브란에게 관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급속하게 약화되는 건강 때문이었다. 지브란은 작가로서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리베이터도 없는 뉴욕의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는 천정이 높고 꾸불꾸불한 복도와 계단이 있어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오르내리느라 수명이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병세가 짙어졌지만 지브란은 주로 알코올로 고통을 덜었다. 그리고 1931년 부활절을 지내고서 혼수상태에 빠져 성빈센트병원으로 옮겨졌다. 나중에 병원 수녀가 가톨릭신자냐고 묻자 지브란은 아니라고 답했다. 지브란은 4월 10일 부활절 첫 번째 금요일 밤에 48세로 이승을 떠났다. 간경화와 한쪽 폐에 결핵 초기증상이 있었다.

지브란의 시신은 보스턴으로 옮겨져 삼나무 성모마리아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고 성 베네딕도 묘지의 납골당으로 이동했다. 그후 8월 21일 마침내 레바논에 도착했다. 레바논 공화국 샤를르 다바스 대통령은 정부 차원의 추도식을 마련했으며, 지브란은 예술훈장을 받고, 성 조지 성당에서 축복을 받은 뒤에 고향 비샤리의 거룩한 삼나무 그늘이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 동굴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처럼 “시냇물은 바다에 이르렀고, 이제 다시 한 번 위대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가슴에 끌어안는다.”

 

[참고]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두레, 2000
<예언자>, 칼릴 지브란, 2018, 무소의 뿔
<영혼을 위한 기도>, 칼릴 지브란, 매월당, 2007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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