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를 사랑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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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를 사랑한 하느님
  • 유형선
  • 승인 2019.12.3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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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바르톨로메오 에스테반 뮤릴로,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아기 예수
바르톨로메오 에스테반 뮤릴로,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아기 예수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밀과 쌀과 감자가 인류를 속인 ‘사기’라고 표현합니다. 농업혁명으로 식량의 총량은 늘었지만, 인구가 폭증하고, 무례하며 건방진 엘리트가 생겨서 인류의 삶은 농업혁명 이전보다 더 고달파졌기 때문입니다. ‘사기’라는 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유발 하라리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동시에 신석기 농업혁명을 구약성경과 연결한 <구약성서로 철학하기>가 떠올랐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하면서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는 농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보면,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치기의 삶을 사는데,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습니다.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는 벌에 복종한 이는 카인이었지만 하느님은 결코 카인의 복종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하느님의 벌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이 언급하지 않은 양치기의 삶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아벨의 선택을 반기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벌을 받는 상황에 복종하기보다 저항하면서 참된 선을 향해 스스로 판단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카인이 선택한 농경생활의 종착점은 부와 권력의 축적물인 도시와 제국입니다. 아벨이 선택한 양치기의 삶은 산과 광야라는 문명의 경계 바깥에서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권위와 전통에 저항하며 혁신과 자유를 추구합니다.

도시와 제국은 강하고 부유하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복종하는 삶을 삽니다. 양치기는 약자이며 가난하지만, 저항하면서 자유와 존엄을 추구합니다. 구약성경은 아벨에 이어 아브라함, 요셉, 야곱, 모세로 이어지는 양치기들의 계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도시와 제국보다 양치기를 사랑하는 하느님을 충실히 기록합니다.

구약성경에 이어 신약성경에서도 양치기 곁에 하느님이 머무십니다. 루카 복음서는 주님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양치기들에게 알렸고, 양치기들의 입을 통해 예수 탄생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기록합니다. 중심보다 주변을, 복종보다 자유를, 재물보다 가난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은 태어나실 때부터, 아니 구약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루카 2,17)
 

* 한국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2월 29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중1독서습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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