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과 마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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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픔과 마주할 때
  • 유형선
  • 승인 2019.11.2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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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삼십년 전 중학생 때 갓 서품 받은 보좌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부님이 신학생 시절 전국을 무전여행 했는데, 우연히 먼발치에서 어느 거지의 행동을 목격했습니다. 거지가 곰탕집 잔반을 모으는 드럼통에 오른손을 넣고 휘휘 젓다가 먹을 만한 건더기를 발견하자 건더기를 꺼내 왼손에 올리더니,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정성스럽게 성호경을 긋고서 식사를 하더랍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사제상에 대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후 신부님은 평생 사회복지사업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 북한에 감자재배 배양기술을 전수하기도 하고 탈북자 지원사업도 오랫동안 하였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를 보면 한센병 환자를 만난 사건이 도입부에 나옵니다. 성인은 청년 시절에 기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들판에서 말을 타고 가다가 한센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순간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겠다는 결심이 있었기에 즉시 말에서 내려 달려가 입을 맞추고 환자의 손에 돈도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한센병 환자의 자취가 사라졌습니다.

 

San Francisco lava a un leproso. J.Segrelles.
San Francisco lava a un leproso. J.Segrelles.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니면 상징적 일화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회심 초기에 한센병 환자들과 생활하면서 봉사한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성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유언을 남기면서 한센병 환자들과 생활한 후 세속을 버렸다고 첫머리에 적었습니다. 평생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수없이 겪으신 분이지만 유언 첫 머리에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했던 경험을 적은 것으로 보아 자신을 변화시킨 가장 강렬했던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타인의 아픔을 만나면 두렵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다가가는 것이 주제 넘는 행동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결같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용기 내어 마주하고 타인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처럼 기꺼이 짊어지라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고통받는 이웃을 배려하고 환대하는 행동은 수단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 고통에 처한 육체를 바라보며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세상과 자신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코 8, 34)

 

* 한국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1월 22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가톨릭일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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