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언제까지 남자들의 승인만 기다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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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언제까지 남자들의 승인만 기다려야 하나?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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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6

“여인이여, 그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8,3-11)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마르코 14,3)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마르 5,25-27)

어떤 여인의 찬가

나의 존재는 나의 아픔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아픔도 선포합니다.
나의 혼은 짓밟히고 억눌립니다.
나는 오랜 세대 동안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는 나를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훌륭하신 하느님, 나를 창조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이 거룩하시기에, 저도 거룩합니다.
당신의 선하심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
우리는 당신을 알지 못했고 틀 안에 당신을 가두어왔습니다.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은 언젠가 당신을 만나
쓴 눈물을 뿌릴 것입니다.
나는 가난 때문에, 당신이 나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품안에서 쉴 것입니다.
우리 식탁엔 빵이 없을 때가 많았지만,
부자들은 어둠속에서 케잌을 먹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여인들을 귀여워하시며
이 지상에 다가올 새로운 날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높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날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후로,
베틀레헴 이후로,
골고타 동산의 십자가 이후로,
여성들의 연민어린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여성들을 방문하였고
가정들은 그 이후로 새롭게 변화 되었습니다.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예수님 탄생 때에 캐롤라인이 씀

 

by A.N. Mronov

위의 성서구절에서 우리는 무력한 처지에서 남성들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여성을 만난다. 이 구절들은 또한 우리 유대-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이어져 온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규정짓는 교묘한 도덕적 기준, 교회가 묵계적으로 재가해 온 이중적인 기준을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만나는 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이 이중적 기준을 단죄한다. 그분은 가짜 의로움(義)을 뒤집어 엎으신다. 즉 심판관들은 심판을 받고, 이중적인 기준이 노출되어 버린다.

간음을 저지른 여인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여성들은 그 여인이 돌 맞으러 끌려왔는데도 함께 있었던 남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예수님도 모래 위에 무언가 쓰면서 침묵의 행동으로 똑같은 질문을 암시적으로 던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던 교만한 사람들은 슬그머니 빠져나감으로써 자신들을 노출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그 기회를 예수님은 여인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이중적인 기준과 그 율법을 악용하고 있던 지도자들을 심판하는데 쓰셨던 것이다.

하혈로 고통을 겪고 있던 그 여인은 바리사이법에 의하여 정결치 못하다고 선언되는 종교적 멍에를 지고 있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로 살그머니 다가가 옷자락을 만졌다. 그 여인은 예수님 역시 불결한 여인과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그같은 법에 의하여 제재를 받을 분이라고 생각했기에 몰래 만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체적 기능의 차이 때문에 여성을 추방하는 그런 법에 의하여 억압받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분은 그 여인과 일치하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높이 들어올리시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그 여인을 부르셨다. 그분은 당신 자신이나 그 여인이 모독당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들을 심판했던 법은 오히려 반여성적인 기준 때문에 그 모순이 노출되었다.

공관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촛점과 그 여인의 신원에 관해서는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주제는 반복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여성의 행위에 관한 남성들의 판단에 도전을 제기하는 데에 이 기회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오, 마르코,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여성의 사랑의 행위가 너무 낭비라고 불평한다. 그들은 묻는다. 비싼 향유를 팔아 왜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쓰지 않느냐고? 요한은 유다 이스가리옷이 실제로는 돈을 훔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옹호하고 당신의 장례준비를 하는 좋은 일이라고 그 여인을 칭찬한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이야기가 복음이 전파되는 한 내내 “그여인을 기념하며” 되풀이 말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루가복음에서 그 여인은 “죄인”이라고 말해진다. 그 여인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인은 창녀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남자들은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은 오명을 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이같은 무력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바리사이인 시몬의 저녁파티에 끼어들어가 놀라운 사랑의 행위를 감행했던 것이다. 시몬은 그 여인을 단죄했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특유한 행동에 대해서도 비난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의 자기독선을 노출시키고 여인의 사랑과 믿음을 찬양하며 그의 죄를 용서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이러한 복음의 이야기들 속에서 보면 여인들은 남성들의 심판앞에 철저히 무력하게 서 있다. 이러한 심판들속에는 여인들은 남성들에게 죄악의 근원이라는 지배적인 단죄가 매복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죄악의 근원이라는 여성관으로부터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중적인 도덕기준이 설립된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죄가 많고 약하다고 규정지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도덕문화의 논리와 술수에 의하여 여성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 약함으로부터 남성들이 유혹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더 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중구조의 기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셨다. 그분은 이중적 기준의 위선을 표현하기 위하여 남성들이 여성들을 단죄할 때마다 그 기회를 한결같이 이용하셨다. 여성들에게서 죄책감의 가짜 멍에를 덜어냄으로서 남성들 역시 그들의 위선과 가짜 독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던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무력함을 겪고 무력한 이를 돌보는 

무력함은 인간체험의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체험 중의 하나이다. 또한 대부분의 인간들이 피하고자 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안전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우선되는 가치관이다. 개인적인 보호로부터 국가안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람으로서 우리자신을 모든 형태의 무력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에너지와 돈을 엄청나게 쓰고 있다. 여성들은 성서의 이야기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무력함을 겪게 된다.이러한 특별한 현실로부터 여성들은 무력함의 체험과 안보에 관한 우리의 국가적 고착에 어떤 새로운 영감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무력함은 여성의 삶에 있어 끊임없이 체험되는 실재이다. 양날의 칼처럼 무력함은 겹으로 여성들의 삶을 절단하고 있다. 즉 한편으론 삶의 모호함에 대해 어떤 진실을 밝혀주고 있으며 약함속에 강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무력함은 여성들이 다스릴 수 없는 힘들 앞에 그들을 무력하게 방치시키지만, 한편으론 똑같이 무력한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일치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무력함에 대한 체험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생명을 지배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더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생명의 과정에 더 기꺼이 협력할 수 있도록 해준다.

소수의 여성들만이 우리 교회나 세계의 구조 안에서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를 즐길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항상 남성의 승인아래 종속적으로 살아 왔다. 한 청년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있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처녀가 할지라도 자신을 무용지물로 느낀다든가, 지성적이고 활발한 여성이 같은 남성 동료로부터 항상 승인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든가 본당에서 여성들의 활동이 본당신부의 선의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든가 하는 현실은 모두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결정할 권한을 상실했다는 표현이다.

여성들의 경제적 취약성은 남편의 죽음, 갑작스런 발병과 사고, 이혼, 별거 등에 따라 삶의 조건이 크게 바뀌는 것을 경험했을 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가족을 위하여 자기의 전 삶을 바쳤던 여인들은 갑작스레 그들 자신과 나머지 가족들을 부양할 아무런 혜택이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의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신체적 폭행이나 성폭행을 경험한 여성들은 그런 공격의 기억이나 두려움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공격에서 어쨌든 자신들이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사회가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할 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여성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오염되어 있어 그들이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특히 성에 있어 무력하기 때문에 사회나 교회는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성문제에 관한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다. 얼마나 자주 젊은 여성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의 책임이라고 경고를 받아왔던가? 그에 비해 젊은 남성들은 이 이중적인 판단기준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여 왔는가? 성적인 빈정거림으로 파괴되는데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얼마나 쉽게 불명예스러운 소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그렇지만 무력함에 대한 여성 자신들의 의식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무력함에 대하여 민감하고 더욱 더 연민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열리게 한다. 그들의 삶을 규정짓는 사회적 교회적 구조앞에서 자주 무력함을 느끼는 여성들은 똑같은 무력함을 체험하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약하고 불안한 이들에 대하여 응답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 노인들, 고통받는 이들, 아픈 이들, 사회의 희생자들, 동성 연애자들, 집 없는 사람들ㅇ, 가난한 이들 등등. 이것은 무력함을 함께 느끼는 데에서 나오는 본능이다. 또한 많은 남성들은 무력함을 느낄 때 같은 남성들과 나누지 않고 여성들과 그 약함의 체험을 나눈다. 이런 친밀함 역시 함께 무력함을 느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무력함의 체험은 여성들의 봉사직분에 힘을 주고 그들의 하느님 체험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원천이다. 무력함을 체험함으로서 여성은 궁극적인 무력함과 인간조건의 의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신앙속에서 알게 된다. 또한 모든 생명의 나약성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여성의 삶에서 치명적인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즉 지배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나 사회 형태에 대한 책임을 피할 변명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희생자의 역할을 거부하고 자신과 다른 무력한 이들을 불의한 구조와 상황에 계속 종속시키는 현실에 대한 변화와 필요한 행동을 피하는 합리화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무력함에 대한 체험을 성찰하게 되면 죄의 의미와 힘의 한계에 대하여 신선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무력함의 체험은 예수님이 보았고 노출시켰던 도덕적 확신감과 이중적 판단기준을 너무 쉽게 따르는 우리들에게 도전을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인간존엄성, 상호의존의 아름다움, 무력함의 힘,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어린 동화(同化)의 필요성을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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