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살아온 날들을 쓴다는 것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쓰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가고 있고 살아온 날들도 그 순간순간의 과정이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한 며칠 후 4계절 옷을 모두 트렁크 하나에 챙겨넣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처음 시작한 곳이 옥구에 있는 양로원이었고, 거기서 할머님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곳은 너무 많은 사랑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정말 가진 것 없이 거지처럼 살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루하루 자연의 신비 앞에서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배웠지요.
그러다 갑작스런 엄마의 병고와 죽음. 못다한 딸노릇을 위해서 양로원을 떠나 엄마의 병실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건만 한달만에 제가 잠 못잘까봐 신음 한번 크게 내지 않으시고 참고 참다가 바보같은 엄마는 제 가슴 가득 사랑만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외로움을 덜어드려야지 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지요. 그러나 저는 가족과 아버지의 걱정거리였어요. 가족들은 엄마가 안 계신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시키려는 거예요. 그동안 한번도 보지 않았던 맞선을 이유 불문하고 봐야한다는 그 당혹감 속에서도 몇번 우격다짐을 겪으면서 이건 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일을 찾아 집에서 나왔습니다.
광주에 있는 정신지체자를 위한 교육기관에서 함께 살았지요. 아뭏든 함께 산다는 것은 편안함이지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곳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편지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몇 개월만에 처음 만나던 날 복지관으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가방은 낡고 낡아서 한 십 년은 사용한 것처럼 여기저기 실로 꿰맨 자국이 엉성하고, 안경테는 끊어졌는지 의사답게 반창고로 동여맸고, 인상은 꼭 수사님 같았다고들 복지관 언니들이 이야기하곤 했었지요. 그때 총무과에서 일했기 때문에 복지관을 안내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복지관 생활도 즐겁고 기뻤지만 그 곳을 나와 간호보조원 학원을 다니는 학원생들과 함께 자취를 했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삶을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원강사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을 무시할 땐 화가 나고 속이 무척 상했습니다.
학원다니면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보건지소에서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학원에 다녔습니다. 결혼했다지만 우리의 생활은 자취생활의 연속일 뿐이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시집갈 때 수저 두 개만 가지고 시집을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집에서 해 준 가전제품도 다 팔아버리고, 우리 집에는 라디오 한 대와 석유난로 그리고 책, 이것이 전부였지요. 공간이 넓어서 편안하고 신이 났지요. 그리고 달라진 것이 없어서 기뻤습니다.
보건지소 생활이 끝나자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우리는 광주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조그마한 의원을 개설했지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그 무한한 가능성 하나로 우린 즐겁고 신이 났지요. 주민들이 주인인 병원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주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의사와 환자 관계가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참 어울리는 그런 관계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가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기쁨이었습니다. 이따금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제가 이 곳에서 일을 도와주는 아줌마인줄 아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저는 자연스러움이고 평안함이고 좋았습니다.
의원이 커지자 우리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떠남은 너무나 아프고 괴로와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공동체적 삶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투신하고자 했는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나온 것에 대한 회한이겠지요. 잘 해낼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도 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우리가 원위치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걱정도 근심도 모두 떨쳐버리기로 했습니다.
뒤돌아봄 없이 그대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는 이곳이 좋습니다. 지금 또 다른 길을 위해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 없이 일에 쫒기고,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달려갔을 때 우리의 내적 충만함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랑의 샘이 말라버렸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채울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서 확인해 봐야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 그 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 물음 앞에 해답이 확연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 다시 투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이라면, 하나의 과정 속에서 맺어진 끈들을 잠시 남겨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순간은 아프고 괴롭겠지만 그리고 숱한 반대와 아쉬움들을 끊어야 했습니다. 그 끄트머리에 또 다른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살아온 날들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경험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융화되어 하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충만감으로 채워갈 수 있고 이웃 안으로 동화되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힘을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 안에 우리가 완전하게 동화될 때, 우린 여기가 우리의 안식처임을 알고 뿌리내릴 수 있을테니까요. 그 뿌리 내림의 순간을 위해서 오늘도 우린 힘차게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2년 5월 제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