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가난으로 공동체를 이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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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가난으로 공동체를 이룰래요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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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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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살아온 날들을 쓴다는 것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쓰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가고 있고 살아온 날들도 그 순간순간의 과정이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한 며칠 후 4계절 옷을 모두 트렁크 하나에 챙겨넣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처음 시작한 곳이 옥구에 있는 양로원이었고, 거기서 할머님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곳은 너무 많은 사랑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정말 가진 것 없이 거지처럼 살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루하루 자연의 신비 앞에서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배웠지요.

그러다 갑작스런 엄마의 병고와 죽음. 못다한 딸노릇을 위해서 양로원을 떠나 엄마의 병실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건만 한달만에 제가 잠 못잘까봐 신음 한번 크게 내지 않으시고 참고 참다가 바보같은 엄마는 제 가슴 가득 사랑만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외로움을 덜어드려야지 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지요. 그러나 저는 가족과 아버지의 걱정거리였어요. 가족들은 엄마가 안 계신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시키려는 거예요. 그동안 한번도 보지 않았던 맞선을 이유 불문하고 봐야한다는 그 당혹감 속에서도 몇번 우격다짐을 겪으면서 이건 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일을 찾아 집에서 나왔습니다.

광주에 있는 정신지체자를 위한 교육기관에서 함께 살았지요. 아뭏든 함께 산다는 것은 편안함이지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곳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편지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몇 개월만에 처음 만나던 날 복지관으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가방은 낡고 낡아서 한 십 년은 사용한 것처럼 여기저기 실로 꿰맨 자국이 엉성하고, 안경테는 끊어졌는지 의사답게 반창고로 동여맸고, 인상은 꼭 수사님 같았다고들 복지관 언니들이 이야기하곤 했었지요. 그때 총무과에서 일했기 때문에 복지관을 안내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복지관 생활도 즐겁고 기뻤지만 그 곳을 나와 간호보조원 학원을 다니는 학원생들과 함께 자취를 했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삶을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원강사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을 무시할 땐 화가 나고 속이 무척 상했습니다.

학원다니면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보건지소에서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학원에 다녔습니다. 결혼했다지만 우리의 생활은 자취생활의 연속일 뿐이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시집갈 때 수저 두 개만 가지고 시집을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집에서 해 준 가전제품도 다 팔아버리고, 우리 집에는 라디오 한 대와 석유난로 그리고 책, 이것이 전부였지요. 공간이 넓어서 편안하고 신이 났지요. 그리고 달라진 것이 없어서 기뻤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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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지소 생활이 끝나자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우리는 광주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조그마한 의원을 개설했지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그 무한한 가능성 하나로 우린 즐겁고 신이 났지요. 주민들이 주인인 병원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주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의사와 환자 관계가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참 어울리는 그런 관계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가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기쁨이었습니다. 이따금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제가 이 곳에서 일을 도와주는 아줌마인줄 아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저는 자연스러움이고 평안함이고 좋았습니다.

의원이 커지자 우리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떠남은 너무나 아프고 괴로와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공동체적 삶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투신하고자 했는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나온 것에 대한 회한이겠지요. 잘 해낼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도 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우리가 원위치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걱정도 근심도 모두 떨쳐버리기로 했습니다.

뒤돌아봄 없이 그대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는 이곳이 좋습니다. 지금 또 다른 길을 위해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 없이 일에 쫒기고,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달려갔을 때 우리의 내적 충만함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랑의 샘이 말라버렸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채울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서 확인해 봐야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 그 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 물음 앞에 해답이 확연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 다시 투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이라면, 하나의 과정 속에서 맺어진 끈들을 잠시 남겨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순간은 아프고 괴롭겠지만 그리고 숱한 반대와 아쉬움들을 끊어야 했습니다. 그 끄트머리에 또 다른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살아온 날들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경험들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융화되어 하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충만감으로 채워갈 수 있고 이웃 안으로 동화되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힘을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 안에 우리가 완전하게 동화될 때, 우린 여기가 우리의 안식처임을 알고 뿌리내릴 수 있을테니까요. 그 뿌리 내림의 순간을 위해서 오늘도 우린 힘차게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2년 5월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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