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제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활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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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제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활성가
  • 아무개 신부
  • 승인 2019.11.0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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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i Rublyov (1360-1427)의 삼위일체(The Trinity)
Andrei Rublyov (1360-1427)의 삼위일체(The Trinity)

늘 가까이에 두고 묵상하는 “삼위일체” 이콘 성화는 나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께서 완전히 일치하시는 “사랑의 집”에 항상 머물고 싶은 열망을 솟아 오르게 한다. 아주 어릴때 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기에 나는 매일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고, 갈수록 험해지는 세상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요한아! 너는 맛들여라”. 지금 내 안에 일하시고, 나를 이끄시는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맛볼 수 없다면 어떻게 나를 비울 수 있고 아무런 보장도 안정도 없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자연과 더불어, 기도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때 발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은 나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고 속삭이신다. 나를 기쁘게 하는 사랑은 모두 하느님께로 부터 온 것이고 거저 받은 것이니, 나 역시 조건없이 거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모시는 성체가 내안에서 녹아 없어지듯, 그렇게 완전히 부서지고 쪼개지는 삶을 살도록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요청하신다.

밥이 되는 길, 똥이 되는 길

새 세계를 위해 떼어 나누어진 삶은 바로 밥이 되는 삶이다. 그래서 나 역시 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그것이 예수님의 삶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밥이 되고자 했고, 양식이 되고자 했으나 철저히 밥이 되지 못하는 한계에 자주 부딪친다. 밥이 되려는 나의 노력에 주목하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가난하게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답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치있는 사람으로 존중되기를 원하나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외로움을 느끼고 만다. 왜? 내 마음을 몰라 주기에, 나의 열정을 몰라 주기에....

그런데 밥은 먹고 나면 똥이 된다. 사람들은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 손에 닿기만 해도 아니 신발 신은 채 밟아도 재수 없어, 하고 눈에 안 보이고 냄새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닦고 또 닦아 낸다. 결국 밥이 되는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다. 인정받음의 길이 아니다. 실제로 “거저준다”는 것은 똥이 되는 길이요, 하느님의 사랑에 맛들이지 못하고 하느님께 삶의 중심을 두지 않는다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 참고 기다림의 길인 것이다.

서서히 가난한 이들을 만나다

주께서 내게 주신 사랑을 명상 속에서 되돌아 본다. 지금 내가 찾았고, 힘을 얻는 엠마오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그 곳은 우연히 내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다.

아주 어릴때, 아니 태어날 때 부터 나를 이끄시는 알 수없는 힘이 있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하느님께서는 내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만남, 대화, 가르침 그리고 빵 나눔을 하기까지 당신을 알려 주시듯 내게도 긴긴 세월을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늘 새롭게 부활하시는 당신을 알아보도록 이끌어 주셨다.

아주 어릴 때까지 나는 웃는 아이, 웃는 웃음으로 입이 얼굴만큼 컷던 아이로 그리고 교회에 가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던 아이로 사랑을 흠뻑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내 곁에서 사랑은 떠난 적이 없고 늘 사랑받는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왔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주 서서히 이루어져 왔다. 성모님께서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기억하셨듯이 주께서는 나에게 그런 특별한 기억력을 주셨다.

난지도에서 염소풀을 뜯기고, 사과 밭에서 삽질을 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대한통운 덤프차 운전수가 되는 것이 희망인 국민학교 친구, 시골에서 1년 동안(모심고 벼가 익을 때 까지), 형과 단 둘이서 하숙 1년, 천막동(무허가 판자촌) 친구들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 가난하던 친구들, 어머니 양장점에서 일하던 누나들, 부랑아 청년들과 소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시던 어머니.

상암동으로 이사하여 완전 변두리에서의 삶 그리고 그 집에 함께 살았던 정다운 이웃들, 마음은 착하나 나쁜 길에 들어섰던 아이들,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다니던 일들,차비가 없어서 학원에 가지 못하던 애닳던 시절, 원하지 않던 자취생활 1년, 성가대에서의 신앙체험, 좋은 친구들.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뜨거운 신앙심은 결국 인생관과 가치관의 변화, 즉 나를 위한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으로 그리고 하느님께 바쳐진 삶을 선택하는 용기를 얻게 하였다. 이 모든 순간 순간이 나에게는 고통이었고 불만이었으나, 그것이 바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 커다란 계획의 연속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는가! 단지 신학교로 이끌기 위함이 아니요. 가난한 이들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도록, 그 기쁨을 맛보도록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초대하셨음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 다가가시고, 이야기 하시고 계속 함께 걸으신다. 내 삶에 있어 기억하기 싫은 과거들이 있다. 그것은 실패한 삶으로 생각되었고 다시는 그런 처지에 놓이고 싶지 않기에 내 삶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반성하고자 노력하면서,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해 왔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었는가?”를 묵상할 때 내 삶의 아픈 기억들이야 말로 나에게 올바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준 가장 중요한 계기들이었음을 발견하곤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사실 내 마음대로 내 요구대로 성취되지 않은 순간들이었기에 나에게 쓰라린 실패감을 주었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또 진지하게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주제파악을 못하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고, 설명하시고, 함께 식사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나의 삶을 오직 당신께로 향하도록 이끌어 주셨음을 의심할 수 없다. 원망에 가득 차 “왜 이런 쓰라린 상처를 나에게 안겨 주어야 하는지?” 항의하였던 그 순간들이 오히려 내 삶의 보약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기도의 내용은 온통 “감사합니다!”로 흘러넘쳤음을 기억한다.

 

BY ANTONYUK OLEKSANDR
BY ANTONYUK OLEKSANDR

떠나라, 침묵하라, 기도하라

이토록 모든것을 거저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지금 이 순간 계속 느끼기 위해 “기도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사막 교부들의 잠언인 “떠나라, 침묵하라, 기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매일 일상사에서 떠나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날마다 성체 앞에 장궤하고는 예수께서 약하고 힘없는 어린 아기로 성모님의 품에 안기시고, 십자가에 달려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을때 모든 자유의지가 꺽인 채 또다시 성모님의 품에 안기듯이 내안에서 일하시는 주님께 의탁할 때에, 비로소 나는 내 삶의 모든 주도권을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다. 기도는 말씀을 들음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요, 그리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는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한다.

“나는 끊임없이 ‘너’와 ‘세계’의 도전으로 박살나고 깨지고 으스러져 가루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쪼개지고 나누어진 빵, 성체의 사랑이 ‘나’와 ‘너’와 ‘세계’를 구원하듯,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가루가 되는 ‘나’의 고통 속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부활하리라 희망한다.”

아픔을 느끼고 이해하는 훈련

거저 나누기 위해 “공동체적인 삶,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의 근본적인 회개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사제가 되는 것만이 아니요,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삶의 양식이다. “삶의 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해서 소명을 찾으려는 노력과 양성(훈련)이 요구된다.

오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에 다양하게 응답하고 있으나, 가난한 삶을 선택하는데 더디고 드물다. 반드시 가난한 이들만을 위한 사목을 하고자 함이 아니요, 단지 우선적으로 선택하고자 하지만 사실 나는 부족함을 느낀다. 완벽해지려는 욕심에서 부족을 느낌이 아니요, 나 자신의 처지를 진실로 똑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부족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참으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픔을 느끼고 이해하는 훈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삶의 고통으로 억압과 부자유를 체험한다. 나는 수없이 그런 아픔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함께하고자 기도했고 나의 견해를 말해왔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가?” 세상에는 빛이 필요하다. 가난한 이들은 빛을 요청하고 있고 그 열망이 극에 달했다. 그들이 요청하는 빛은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을 알게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일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투신하는 것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아픔을 선물로 이해할 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부활하신 하느님을 대면하고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으로 가득하리라 믿는다.

오랜 기도와 성찰을 통해 내가 원하게 된 구체적인 사제직:

1) 공동체의 활성가로서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가난한 이들의 요청에 교회는 복지와 운동, 두가지 차원에서 응답하고 있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복지’나, 소외의 근본원인을 분석하고 변화시키려는 ‘운동’이나 모두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실상은 크게 분열되어 있다. 이 두 차원의 일을 폭넓게 이해하고 영성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 조정하는 사람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2)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생활수준에서 살면서 그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들의 마음 속 뿌리깊은 곳에서 강하게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가난한 사람을 우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가난과 고통속에서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과 이 세계의 연대성 안에서 볼때 참으로 의미있는 것임을 깨달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게 하고 싶다. 나 자신이 스스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의미를 발견하는데 전문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3) 끝으로 교회의 사람이기에 교회의 뜻에 순명하는 삶, 겸손한 삶을 가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싶다.

“사람이 많은 일을 하지만, 성사는 하느님 뜻에 달렸다.”는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을 희망한다.

 

[출처] <하나되어>, <참사람되어> 1987년과 1992년의 생활글 모음집(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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