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예수에게도 한 수 가르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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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예수에게도 한 수 가르친 여성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0.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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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2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예수와 시로 페니키아 여인 사이의 만남은 마르코와 마태복음 모두에 등장하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부분들은 차이가 있으나 중심 줄거리는 똑같다. 우리는 이 여인이 이방인, 즉 이스라엘의 계약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여인의 집요한 간청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딸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는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영적인 교류도 담겨져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도전에 대한 예수님의 개방적인 태도도 표현되어 있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토록 무력한 처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그 여인은 이방인이고 여인이며 국외자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접근할 권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용기로서 그 여인은 제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며 예수께 소리쳤던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된다는 대답을 하면서, 당신과 여인 사이를 대립케 하는 행동을 취하신다.

 

이 장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수와 대면하는 여인의 용기, 제자들 그리고 딸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인해 당겨질지도 모르는 욕설의 가능성. 딸과의 관계가 최우선이라는 사실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상황을 2차 순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고뇌속에 예수의 엄혹한 대답은 비수를 꽂는 것이었으나, 여인은 단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기게 더 애원하였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면, 딸을 위해서라면 강아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은 하느님의 잔치상이 넘쳐흐른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인정하도록,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부스러기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주장하였다.

여인의 집요함과 지혜가 예수를 기쁘게 하고 도전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즉시 생각을 바꾸어 당신의 사명이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여인의 “깊은 믿음” 때문에 간청을 받아들인다. 국적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이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매우 분명한 요소가 되었다.

딸에 대한 성실함과 예수의 치유능력에 대한 믿음에 관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연민의 수문을 넓게 열어놓는다. 이 주제가 예수님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복음에 의하면 이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부추긴 사람은 여성이었다.

예수의 문화적 종교적 한계를 무너뜨린 여인

시로 페니키아여인의 행동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딸의 치유를 구하면서 당시 사회의 모든 문화적 종교적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용기와 끈기에 있다. 이러한 용기와 끈기는 여성들을 어떤 일정하고도 한계적인 역할에 국한시키는 모든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깨뜨리려는 수세기에 걸친 여인들의 삶과 투쟁속에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교리교사로, 성체분배자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귀중한 체험과 의사는 공동체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 차별적인 현재의 상황앞에서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우리 여성들도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해야 하며 교회가 여성에 관한 전통적 사고를 바꾸도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여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이해에 따라서 여성의 역할은 무엇이며 인간의 성이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우리 모두가 재고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질문들은 주로 교회의 남성중심적인 교계에 의하여 규정지어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가 여성들과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보도록 요청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교계와 성직자들의 태도, 설교로부터 제외되고 교회의 정책결정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등 우리는 교회의 가부장적 제도, 즉 남성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교계가 여성들의 가능성과 성소에 관한 이해에 있어 너무나 부족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정책결정 과정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여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적 성찰의 총체성을 교의나 도덕, 사목적 분야에서 결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서의 이러한 차별과 소외는 사회에서 여성의 불평등을 계속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정의라는 주제에 있어 사회는 교회보다 앞서가고 있다.

시로 페니키아여인은 참으로 앞선 사람이었다. 그 여인은 위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조소, 증오와 대면하였고 심지어 예수님의 태도에 도전하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야말로 그 당시 존재하였던 종교적 배타성의 장벽을 허물었고 또 그 여인의 딸을 치유케 하였을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의 사명을 확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주변의 온갖 장벽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에 투신할 수 없을까?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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