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당도한 하느님 나라, 갈릴래아에...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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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당도한 하느님 나라, 갈릴래아에...지금여기에
  • 한상봉
  • 승인 2019.10.2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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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 예수-5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4-15)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에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
별들이 뜬, 별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도종환 시인의 <어떤 마을>이라는 시입니다. 어느 누구도 남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 일해 밥을 벌고, 밥 짓는 냄새 소곳하게 올라올 때,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마을 잔잔하게 비추어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데, 아직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기에 우리의 갈망은 더욱 간절해지고, 그 갈망의 끝자락에 놓인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회개하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마태 3,2). 예수는 누구보다도 세례자 요한을 잘 이해하고 존경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는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로 나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고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알다시피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예언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요한보다 더 크지 못합니다”(루카 24-28)

예수는 왕궁과 광야를 대조하며, 귀족과 예언자를 대조하며, 광야와 예언자를 선택합니다. 그 정점에 세례자가 있었고, 예수는 그 세례자의 뜻에 공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한이 잡힌 후에’ 그가 마저 하지 못한 일을 계속하기 위해 갈릴래아로 길을 나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광야를 버리고, 요르단 강마저 벌고 그이는 사람이 사는 ‘마을’로 먼저 내려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요한은 ‘곧 다가 올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심판과 백성들의 회개를 먼저 선포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루카 3,9) 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나라는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막연히 기다리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날짜를 헤아리며 목욕재계하고 기도하고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처럼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게 그분의 나라를 먼저 살기 시작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르죠.

 

루이 에블리는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사랑이라는 면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존하고 계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을 보라! 하느님은 거기에 계신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당하시고, 자유를 빼앗기시고, 포박당하시고, 굴복당하셨다. 그런데, 당신 자신을 보라. 떠나가 버리는 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 완전히 자유이다.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강한 법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할 차례입니다. 그분의 나라를 살아감으로써 그분의 나라를 ‘지금여기’에 현존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할 순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합니다만, 이는 마치 죽어서 가는 저승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늘 듣게 되는 이야기가 생전에 잘 살아서 죽어서 ‘천국(天國, 하늘나라)’ 가자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승의 삶은 늘 저승에 저당 잡힌 꼴이 됩니다. 웬만하면 참고 살자, 죽어서 영생 누리지,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반듯하지 않으면 내일 역시 그릇될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 없이 천상의 복락은 없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고, 인간역사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애타서 우리를 갈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신약성경에서 30회 이상 나오는데, 오직 마태오복음에서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및 바오로 서신 전체에 걸쳐 두루 사용됩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서 사용한 ‘하늘’ 역시 사실은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일 뿐입니다. “청와대가 발표했다”고 했을 때, “대통령이 발표했다”는 뜻인 것처럼, 하늘나라는 곧 하느님나라와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나라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의 말마따나,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 안에 머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을 하늘로 피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 방식으로 거룩한 혁명을 하자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느님’은 종교용어이고, ‘나라’는 정치용어입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카이사르(정치)가 하느님(종교)이기 때문에, 이미 하느님이 카이사르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얼굴이 담긴 동전에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을 뜻하는 'Divi F'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곧 ‘하느님의 통치’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 나라에서는 하느님만이 통치하시고 만인이 평등한 나라가 됩니다. 로마인과 달리 유다인들은 어느 인간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는 결국 로마제국과 전혀 다른 나라를 선택 결단하라는 강력한 요청이 됩니다.

한편 예수는 요한과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독점권을 갖고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전했다면, 예수는 복음을 제자들과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만 세례를 받으러 갔습니다. 따라서 성전세력 등 기득권층을 위협하는 대중적 세례운동을 중단시키려면 요한만 처형시키면 됩니다. 요한이 죽더라도 한 두 세대 동안 유다인들은 그를 추억하고 곱씹고 슬퍼하겠지만, 결국 세례운동은 요한의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의 세례운동처럼 한시적인 운동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 사진=한상봉
갈릴래아 호수. 사진=한상봉

예수는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이미 받아들였고, 이미 그 속에 들어갔으며, 그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합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에게 그들도 여기에 참여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본 그대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루카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가 대답 대신에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7,22)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처럼 설령 예수가 처형되더라도 하느님 나라를 이미 경험하고 이미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계속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나자렛이나 가파르나움에 머물며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을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직접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나섰으며, 제자들에게도 자신처럼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가난한 이들과 식탁을 나누도록 파견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치유하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치유하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라고도 이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 역시 사람들을 치유하기 전에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병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 자기 능력을 광고하지 않았으며, 병자들이 확신 속에서 요청할 때 비로소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 역시 우리들의 간절한 요청에 하느님이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성취될 나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는 이 모든 일을 유다의 중심이 아닌 지역에서 시작했습니다. 고향 나자렛을 포함해 갈릴래아의 민중들과 먼저 만났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동지를 찾고 벗으로 삼았습니다.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변방에서 정겨운 산천을 거닐며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었으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쳤던 것이지요.

예수는 이처럼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래아에서 살았으며, 예루살렘에서 처형된 뒤에 부활하여 다시 돌아간 곳도 갈릴래아였습니다. 이 지역은 호수를 끼고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로 ‘이스라엘의 어머니’(사무엘 2. 20,19)로 여겨졌지만, 소작인들과 가난한 어부들이 많았던 땅입니다. ‘밥티처럼 따스한 별이 뜨고, 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래아는 부재지주의 착취로 어려웠지만,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더 먼저 알아볼 수 있었던 땅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갈릴래아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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