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톨릭 청년, 동아시아의 덧난 상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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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톨릭 청년, 동아시아의 덧난 상처를 만나다
  • 야나가와 토모키
  • 승인 2019.10.0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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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예수회 평화 청년 프로젝트 참가 후기

“전쟁은 인간이 벌인 일입니다.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전쟁은 죽음입니다.” 1981년 2월 25일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원폭지 히로시마에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장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교황이 히로시마 평화 호소에서 4차례나 반복한 이 문장을 지금 저 역시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황 방문 37년 만인 지난해(2018년) 2월, 우리 9명의 일본 청년은 ‘역사화해를 위한 여행’으로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예수회 나카이 쥰(中井淳) 신부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평화 청년 프로젝트’ 제1탄 여행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일반적인 관광 여행, 그러니까 흥미로운 관광지를 돌며 아름다운 경치와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독립 기념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등 보통의 일본인 관광객이라면 들르지 않을 장소를 방문하고, 또 재일조선인과 조선 학교를 지원하는 단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단체 등을 찾아 가 얘기를 들으면서 일본이 한국 사회에 준 상처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깊은 상흔과 대치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사진=신배경
사진=신배경

참가자 중에는 저처럼 몇 번이나 한국에 와 본 청년도 있었고, 한국에 처음 온 청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가한 젊은이들의 공통점은 결코 ‘즐거운 기분’으로 이 여행에 참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모두들 모종의 긴장감 속에 참가했고, 사실 공포와 불안감을 느끼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청년도 많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인 ‘일본인’이라고 비난받게 되지 않을까. 엄청난 분노와 슬픔, 원한을 쏟아내는 건 아닐까. 한국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더 증오를 키우게 되지는 않을까. 청년들이 품고 있던 것은 그런 불안과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괴로운’ 여행에 참가한 걸까요. 나카이 신부가 권유하니 거절할 수 없었기(또는 속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에서 소개한 교황님 말씀처럼,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실제로는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로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자 정의를 추구하는 신앙인으로서 현대 세계에 ‘화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년들은 모두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를 통해, 상처에 담긴 아픔을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냥함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깊게 꿰뚫은 것도 사실입니다. 방문한 장소에서 기도와 나눔을 하던 사이, 몇 번이나 눈물이 우리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혼자 있었다면 분명 반복적으로 찾아드는 그 아픔과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곁에는 같은 신앙을 지닌 동료가 있었습니다. 함께 여행한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들도 동료였습니다. 신앙 속에서 흘린 눈물은, 단지 괴로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염없이 흘린 많은 눈물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은 여자처럼(루카 7,36-50), 그만큼 우리가 많은 ‘용서’를 경험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전후 최악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의 많은 미디어가 날마다 그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미디어가 (의도적으로?)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본 사회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안에도 내셔널리즘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야 말로 우리 한일 시민은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위협이나 제재, 보복이 아니라 화해와 대화를, 외교적 노력을 통한문제 해결을 자국 정부에 요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긍지와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지닌 편견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갑옷.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불편한 주장에 귀를 막는 철벽 방패.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이나 존재를 공격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는 날카로운 칼.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그런 ‘무장’을 하지만, 마음의 무장 해제가 필요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무기를 움켜쥐기 위해 닫힌 손을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개봉한 <주전장>(主戦場)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본에서 화제였습니다. 여름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고 들었는데, 보신 분도 계시겠네요. 영화는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긍정파와 부정파의 논의를 충돌시키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논객들 각각의 주장도 물론이거니와, 일본 젊은이들에게 의견을 요청하자 인터뷰 요청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뒤섞여 있겠지만,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본의 교육에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무지와 무관심이라는 또 하나의 벽도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최근 일본에서 또 하나의 걱정스러운 현상이 생겼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전시하던 예술제가 ‘반일’이라 주장하는 시민과 정치인들의 압력과 공격 때문에 중단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도 지난해 실제로 일본대사관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소녀상을 찾아 갔었습니다.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가리키며, ‘반미’ 시설이라 분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끔찍하게 파괴된 그 건조물이 보여주는 것은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또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에서 만난 소녀상으로부터는 일본에 대한 증오를 넘어 어떠한 성차별도, 성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기도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함께 평화에 대한 결의를 다졌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눈감아 버리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은 부정적인 역사를 용기 있게 기꺼이 직시하는 일은 풀기 어려운 일이니까, 이미 지나간 이야기니까, 라는 변명을 하지 않으면서 아픔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때로 혼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을 동료와 서로 나눠지는 일, 그것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배움입니다. 짐을 나눠 질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인 동시에 화해를 향한 첫걸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용감하거나’ ‘훌륭한’ 청년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함께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동료가 있고, 힘도 없고 상처투성이에 죄 많은 우리를 결코 혼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도 다른 이에게서 받은 상처도 다른 이에게 준 상처도 신에게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2019년 11월에는 38년 만에 교황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5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의 이번 방일이 일본 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큰 의미를 부여했으면 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더 좋은 관계성을 지향합니다. 그 가능성을 믿고 마주보는 과거는 반드시 미래에의 길을 개척해 줄 것입니다. 두 나라를 잇는 가교로서,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문으로서, 우리 ‘평화 청년’은 앞으로도 두 손을 활짝 열어 나가겠습니다. 함께 걸어 나갑시다!

* 이 글은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야나가와 토모키(柳川朋毅)
예수회 도쿄 사회사목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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