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는 날은, 예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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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는 날은, 예수에게로
  • 한상봉
  • 승인 2019.10.01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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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 예수-2
영화 [Killing Jesus] 스틸사진
영화 [Killing Jesus] 스틸사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들에
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얘지고
밤길을 걷는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
눈처럼 하얘지고
소리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 앞에서
눈의 순결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시리도록 내 뼛속이
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

김남주 시인의 <첫눈>이란 시입니다. ‘처음’이란 그런 것이겠죠. 아무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어느새 문득 내 앞에 선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웬일이지?” 묻지 못하고 입 다물고 그저 얼굴만 빤히 쳐다보게 하는 그런 설레임, 궁금증, 조갈(燥渴)이라 해야겠죠. 먼저 말문을 열어 “저 왔어요.”하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온 생각 내려놓고, “추워요. 차 한 잔 먼저 주세요.” 말해주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르코 복음서의 첫장을 여니, ‘처음’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요.

마르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그분이 전한 모든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던 사람입니다. 캄캄한 밤중같은 세상을 첫눈처럼 하얗게 덮어줄 이야기를 듬뿍 지니고 오신 분이기 때문이고, 그분 자체가 첫눈처럼 환해서 복음인 사람에 대해 말할 참입니다. 그 말이 너무도 순결해서 뼛속이 시리도록 등골에 소름이 끼치도록 떨린 음성으로 “예.”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갈망이 컸던 탓이겠지요. 우리의 절망이 작지 않았던 까닭이겠지요.

마르코복음은 그분이 성큼 우리 안에 들어와 당신 일을 막바로 시작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 이야기를 통해 본격적인 그분의 일을 조금 미루어두고 있습니다. 숨고르기라도 할 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굿간에서 성령의 힘을 입어 처녀인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며 밤을 지새우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여러분은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이니 이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표징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생존권을 남에게 맡긴 채 무력하게 말밥통 위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들의 메시야는 이런 분이었지요. 객지에서 변변치 못한 마굿간에서 짐승처럼 태어난 아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거지요. 그래서 복음입니다. 누구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말입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형상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전하는 동안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고 주님의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복음도 있었습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예수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특별한 잉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기원전 63년 9월 23일에 태어난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로마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은 황제입니다. 그의 어머니 아티아는 아폴론 신전에서 깊은 잠에 빠져, 뱀의 모습을 한 신에 의해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아내의 자궁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예수처럼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신인 아버지와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잉태된 것이지요.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에도 하느님의 아들인 왕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이제 토성이 지배하는 황금의 시대가 출현한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동정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와 함께 등장하는 토성의 지배.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인간. 그 아이는 나중에 세상을 다스리며, 타락한 철의 시대를 끝내게 하고, 현세에 찬란한 황금의 시대를 가져다줄 것이다.”

마르코복음 사가가 사용한 ‘복음’이란 말은 본래 황제의 출생이나 즉위식과 관련된 용어였습니다. 즉, 로마제국에서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이라고도 불렀지요. 이런 메시아의 출현을 ‘복음’이라 부른 것입니다. 당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으로 숭배되었고, B.C. 9년 소아시아 도시 연맹 (Asian League)은 프리에네 (Priene)에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경축하기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문을 기록해 놓았답니다.

“인간을 향한 신의 섭리는 신의 열심을 가지고 아우구스투스를 보내심으로 인생들을 위해 가장 최고의 역사의 정점의 시간들을 마련해 주었다. 신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 메시아(구세주)를 보내주었다. 이 메시아(아우구스투스)는 세상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평화로운 상태로 만들었다. 그가 세상에 등장함으로 이전에 우리 앞에서 ‘복음’ 을 주었던 모든 사람이 주었던 소망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 앞에 존재했던 은인들보다 더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어떤 사람도 그가 준 소망보다 더 뛰어난 소망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위한 그의 업적 때문에 ‘복음의 시작’은 그 신의 생일날(9월 23일)이 되어야 한다. 아시아에서 스미르나가 칙령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생일로 우리의 인생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준 행운과 그가 우리에게 준 구원 때문에 아시아에 있는 헬라 도시들은 새해의 시작은 아우구스투스의 9월 23일로 시작하기로 칙령을 내린다.”

이처럼 로마와 소아시아 백성들이 아우구스투스 로마황제를 메시아이며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에서, 마르코복음은 예수가 태어난 것이 복음(기쁜 소식)의 시작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곧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이 세상의 시작이라는 메시지에 도전하는 것이었지요. 세상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기뻐합니다.

결국 예수와 아우구스투스는 출생의 시기와 과정이 엇비슷하며, 평화의 왕으로서 복음을 만방에 전해 줄 신의 아들,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을 추앙한 사람들은 제가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와 그 식민지의 모든 권세 있다는 자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따랐겠지만, 식민지 통치아래서 고난받던 백성들은 예수를 선택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예수의 부모는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승승장구하여 로마를 삼켜 황제가 되었으나, 예수는 뼈저린 적빈(赤貧)의 처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결국 세력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로 세상을 평정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세상에 돌을 던지고 사람들 마음속엔 하느님의 자비만 남겨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던 자가 한편에 있었으며, 한 줌 옷마저 빼앗긴 자가 다른 한편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 출생의 비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황제를 구세주로 숭배했던 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처럼 외롭지만 고단한 길을 잠잠이 걸어갔습니다. 시몬 베유는 그리스도교를 ‘노예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가난하고 억압받는 남루한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소유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복음의 시작을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에게서 시작할 것인가?” “아우구스투스의 운명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운명을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당신은 지금 하느님이 계시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아우구스투스 안에서인가, 아니면 예수 안에서인가?”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와 예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눈 내리는 날, 고봉으로 쌓이는 첫눈을 밟으며 가난한 우리 마음이 어느새 밤길을 걸어 그분에게로 다박다박 다가가고 있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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