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헤진 멍든 가슴, 난민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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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헤진 멍든 가슴, 난민을 생각하며
  • 유형선
  • 승인 2019.09.2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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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서울역 근처 염천교에는 <울며 헤진 염춘교>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가 1960년대에 불렀던 동명의 영화 주제곡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모도 잃은 남매 정든 고향 하직하고
낯설은 서울역에 손가락에 맹세 걸고
이 년 후 추석날 밤 염천교에 달이 뜨면
돈 벌어 만나자고 울며 헤진 멍든 가슴
아~ 이 무슨 슬픈 운명 하늘 아래 두 남매"

옛 노래지만 가사만 봐도 어려운 시절 부모와 헤어지고 남매끼리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집안 어른들로부터 6·25 피난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난민의 후손입니다. 6·25 전쟁으로 6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생겼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정통성을 두는 상해 임시정부도 나라 잃은 유민들이 타향에서 세웠습니다. 한국 초대 천주교회도 피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이벽, 정약전 등과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시작한 조선천주교회는 초기 백 년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는 박해를 겪었고, 박해를 피한 이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꾸렸습니다.

그리스어 ‘엑스 호도스(ex hodos)’에서 유래한 엑소더스(탈출기)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길 밖으로’를 의미합니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이나 전쟁, 종교 박해처럼 국가적 단위의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길 밖으로 던져져 타향으로 흘러갑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네 신앙의 선조들은 길 밖에서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잃어버린 서로를 하느님을 모시듯 끌어안으며 살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보드네 신부는 1899년 전라도 양학공소를 방문한 뒤 고국에 편지를 씁니다. ‘주교님 저는 놀라운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자들은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콩 한 쪽도 나눠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시대 공동생활이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난민의 역사는 약자의 역사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몰린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억눌리고 쫓겨나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손을 잡는 게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그때에 우리네 손에 하느님이 머무르십니다. 그제야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9월 22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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