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실천의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9월 가톨릭일꾼 월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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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실천의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9월 가톨릭일꾼 월례미사
  • 신배경 기자
  • 승인 2019.09.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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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9일 신촌 인문카페 엣꿈에서 <가톨릭일꾼> 9월 월례미사가 있었다. 서울교구 답십리 성당 보좌 박성준 프란치스코 신부 주례로 “헨리 나웬”을 기념하는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동안 가톨릭일꾼운동에 활발히 참여해온 분들과 관심을 갖고 찾아오신 분들이 17명 모였다. 개신교 신도 두 분이 처음 오셨는데, 가톨릭일꾼 페이스북을 통해서 미사 소식을 알게 되셨다고 했다. 평소 헨리 나웬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심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월례미사라는 소식이 가톨릭일꾼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반가운 손님들과 함께 처음 시도해보는 떼제 성가와 더불어 9월의 월례미사가 봉헌되었다. 신부님이 미사 중 강론에서 헨리 나웬에 대해 묵상하신 바를 나누어 주셨으며, 미사 후에는 각자가 느낀 바를 자유롭게 나누는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나눔은 다과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덕숙 포티나 님이 직접 쪄서 가져오신 모시송편이 함께 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이날 봉헌금은 지난 8월 월례미사 봉헌금과 함께 <가톨릭일꾼> 이름으로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 님을 위한 연대의 기금으로 전달하였다.

 

[헨리 나웬 기념 미사 강론_박성준 프란치스코 신부]

찬미예수님!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헨리 나웬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가장 치열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시작은 한상봉 선생님의 헨리 나웬 기념미사 부탁이었습니다. 헨리 나웬이 영성적으로 유명한 분이라는 것, 그리고 몇 편의 글을 단편적으로만 읽었던 저에게 30분 강의 겸 강론을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시 데이 추모 미사 때도 말씀드렸지만, 원래도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한 선생님의 부탁은 더더욱 거절을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기념미사를 정성스럽게 봉헌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 자신도 헨리 나웬에 대해서 조금 더 배우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아가자는 마음에서, 일주일간 강론 준비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묵상하면서, 헨리 나웬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

첫째 키워드. 영적 삶

헨리 나웬과 관련된 글 안에서 가장 많이 발견했던 말은 바로 '영적 삶'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이 '영적 삶'이라는 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이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기운',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육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의미의 'spirit'을 '영'으로 해석하고 있다 보니, '영적 삶'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인 이 땅에, 이 세상에 발 디디고 하루하루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삶이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육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라, 세속적인 것을 거스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세상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그리스도의 것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삶'의 핵심이었고, 헨리 나웬은, 이 '영적 삶'이 우리를 하느님의 집, 사랑의 집으로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키워드. 성령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모두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마음에는 또다시 두려움과 막막함이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그들과 함께하셨던 분이 이제는 함께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오순절에 그 약속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또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예루살렘에, 그것도 자신들이 평소에 묵었던 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시고 그분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은 더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주신 사명,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을 이어갑니다.

안주하는 삶에서 도전하는 삶으로의 변화,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대면하고 투쟁하는 삶으로의 변화. 그 중심에는 바로 성령께서 계심을 헨리 나웬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도들처럼 스승님의 사명을 이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alter Christus,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초대장으로 보내시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구체적 현장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예수님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이 아니라 유혹과 굶주림과 목마름의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이 세상에서 여러 사건과 상황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헨리 나웬은 이 세상을 '유혹자의 집'이라 표현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 관심을 독차지 하고 싶은 유혹, 강력한 힘을 쥐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이 땅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그 자리로 보내신 이유는 그 유혹에 굴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 전에도 나누었던 것처럼,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적 삶을 깨닫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속적인 것들 더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길,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길은 위로 향해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오히려 내려가는 길입니다.

셋째 키워드. 아래로 내려가는 것

헨리 나웬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아래로 내려가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시작부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그분께서 거룩한 특권들을 벗어버리고 그대로의 우리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써 인간에게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신비가 우리 신앙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서도 더욱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권력층이 아니라 변두리의 사람들에게, 성한 이들이 아니라 아픈 이들에게,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내려가심은 영광의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이라는 처절함 안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길,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에 익숙해 있고 또 사회의 여러 현상들로부터 그렇게 교육, 아니 세뇌당해왔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거머쥐고,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삶을 실패했다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 부르면서도, 그리스도의 것을 붙잡기보다는 인간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손에 한가득 움켜쥐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돈, 권력, 명예,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 내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이 나의 삶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보니, 하느님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을 '남는 손'이 없습니다. 그러한 삶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을 것입니다.

온전하고도 실제적인 자유는 오직 아래로 내려가는 길 위에서 얻어집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야말로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고, 그 길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과 평화, 그리고 자비가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이끌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여정, 그분께로 돌아가는 영적 삶을, 렘브란트의 그림이자 복음의 유명한 비유인 '돌아온 탕자' 안에서 묵상합니다. “당신이 작은 아들이든 큰아들이든 간에, 당신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초대를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970년대 새벽 공동체로 헨리 나웬을 이끌었던 수 모스텔러가 그에게 했던 이 초대의 말이, 저를 초대하는 말로도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품의 그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후회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며 걸어가는 그 길은, 재산이 넉넉했을 때 방탕한 생활을 했던 그 장소들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작은 아들을 대하는 그 장소들과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더이상 호의적이지 않고, 연민의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피하거나 패배자를 대하는 태도로 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을 떠날 때나, 집에 돌아올 때나, 내 상황이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태도는 한결같습니다. 사랑, 자비, 연민, 받아들임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자비 넘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작은아들은 내려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는 재산을 받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그가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몸을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목을 구부리고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시선을 낮추었습니다. 그렇게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자비에 안깁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작은아들은 엄청난 죄책감과 후회, 자신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실망, 수치스러움 부끄러움 등 치욕의 순간을 거쳐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믿음과 의심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들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들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아픔들을 인내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하느님의 시간이었고, 그 장소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그 길 끝에 바로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느님의 집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연인

영적 삶, 성령,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 이렇게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헨리 나웬에 대해 알아보며 느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헨리 나웬은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투신하고자 한 “하느님의 연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한다는 생각이나 마음이나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헨리 나웬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영성가였습니다.

영성이라는 말 안에는 이미 실천의 의미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영성’이라는 말 앞에 ‘실천적’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헨리 나웬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이 땅 위에서 하느님을 말하고 있었고, 실천의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헨리 나웬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영적 삶으로 인도하는 이 시대의 모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또 끊임없이 당신께로 돌아가는 삶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믿음과 불신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만나를 청하고 그 시간들을 인내하도록 격려하던 이가 바로 모세였습니다.

헨리 나웬이 2019년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인 우리를 바로 그렇게 하느님께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말 한마디 한마디와 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만나로 다가오고, 그분께로 향하는 길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그가, 우리를 당신께 인도하는 것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드리는 미사는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념하지만, 오늘 미사는 특별히 그분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헨리 나웬 또한 함께 기념합니다. 미사는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머리로 생각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반면, 기념한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실현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사는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이 이 자리에 육화하는 단 한 번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미사에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헨리 나웬과 그의 정신을 이 자리에 육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미사로 우리는 다시 유혹자의 집인 세상 속으로 파견됩니다. 여기 모인 가톨릭일꾼 여러분들은 가장 낮은 이들과의 공감과 연대로, 각자의 자리에 하느님의 집을 세우는 분들입니다. 이 미사 중에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배경 클라우디아
가톨릭일꾼 애니메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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