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고 천둥 같은 심판을 비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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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고 천둥 같은 심판을 비껴갈 수 있을까?
  • 한상봉
  • 승인 2016.06.0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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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하느님을 보다>,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12

종교개혁이 일어난 모든 곳에서 그림들이 폭동 가운데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뜯어낼 수 없는 벽화에 석회를 발라버렸고, 조각품들은 산산조각을 냈다. 전염병처럼 번진 ‘성상 파괴’는 그동안 착취당했던 농민들이 압제자들에게 가한 복수였다. 교회에 조용히 걸려 있을 뿐이었던 성스러운 물건들이, 직전까지 이 성상들 앞에서 경건하게 무릎을 꿇던 사람들에게 파괴됐다. 그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었다.

예술, 상징을 통해 하느님의 영으로 들어가는 문

중세 말 교회에서는 성상을 수단으로 미신 같은 행태가 자행되었고, 교회는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도배되었다. 츠빙글리가 분노했듯이, 음탕한 화가들은 살빛이 곱고 매끄러운 여자들만 그렸다. 결국 성상 파괴는 교회의 타락에 대한 윤리적 · 종교적 분노였다. 이들은 성상을 거부함으로써 이 부패를 척결할 것을 다짐했다. 형상을 거부하는 구약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생각을 근거로 마련된 개신교의 공간에는 어떤 장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에서 성상이 제거되자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상징적 사고도 동시에 파괴되었다. 발터 니그는 <미켈란젤로: 하느님을 보다>(분도출판사, 2012)에서 “인간은 종교적 그림을 감상하며 상징적으로 느끼는 법을 배운다”고 말하며, 성화가 백성들에게는 그림으로 된 성경이었다고 전한다. 그동안 신자들은 성화와 성상이라는 예술적 상징을 통해 영적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는데, 예술이 교회에서 박물관으로 쫓겨나면서 작품들은 세속화된 전시물로 변했다. 영원으로 향한 통로가 이렇게 차단되었다.

발터 니그는 “예술은 그 깊은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종교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종교적’이라고 말했다. 영국 신비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예술은 구원으로 가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말했으며, 휠더린이 “시인은 거룩한 그릇”이라고 말한 것처럼 화가도 직관적 능력과 자신의 재능을 통해 신성에 형체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이 성상과 성화가 파괴된 직후, 예언자처럼 나타난 피렌체의 예술가가 미켈란젤로다.

묶여 있는 노예, 1520-1523, 피렌체국립미술원

미켈란젤로는 ‘종교적 본성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발터 니그는 말한다. “그에게는 어떤 교리보다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영혼이 더 중요했다. 이 영혼의 배고픔은 하느님만이 달래주실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향해 일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한창 나이 때 교황이 성당 천장에 금칠을 더 많이 하라고 명령했다. 교황에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교황 성하, 예전 사람들은 금으로 몸치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가들이 그리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라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호사스러움을 업신여겼습니다.”

하느님의 눈길을 감당할 수 없는 영원한 노예

미켈란젤로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조각이었다. 그는 대리석에 자기가 만들려고 하는 형상이 살아 있으며, 그가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겼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대리석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무아경에 빠졌다. 베드로 첫쩨 서간의 “살아있는 돌이 되라”는 권고가 그에겐 현실이었다.

그 작품 가운데 ‘묶여있는 노예’는 노예의 형상이 돌에서 분명하게 돌출되어 있지 않아서 미완성인 것 같지만, 미켈란젤로가 노예의 윤곽만 드러내고 그만둔 바람에 노예가 돌이라는 재료에 완전히 갇혔다는 인상을 준다. 이 돌에 새긴 것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운명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노예보다 강한 ‘중력의 영’이 그를 완강하게 움켜잡고 있다고 느꼈다.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전력으로 싸우는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면서, <천지창조>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직접 묘사했는데, 이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라는 과제 앞에 인간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발터 니그는 “감상자는 하느님의 눈길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면서 “하느님의 눈길을 견뎌 낼 수 있는가?” 묻는다. 이는 달달 외우기만 한 기도문을 태워 재로 만들고,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에게서 발하는 빛 앞에 세우는 일이었다.

<아담의 창조>에서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이루신 그분의 ‘말씀’ 대신에 곧게 뻗은 하느님의 팔을 그렸다. 잠에서 덜 깬 듯한 얼굴로 흙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팔을 내미신다.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아주 가깝게 마주하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닿지는 않는다. 발터 니그는 이를 두고 “아담이 내민 손은 인간이 본질상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느님 안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여기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이라는 신적 근원이 있음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손가락에 닿아 생겨난 영혼의 불꽃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인간 안에 머물고 있다. 이 불꽃은 꺼질 수 없다. 특히 인간이 끔찍할 정도로 멸시받는 시대에는 상실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고귀함이 강력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이처럼 발터 니그는 미켈란젤로가 강력한 인본주의자였음을 밝혔다.

‘아담의 창조’, 1508~1512,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 사보나롤라의 불길 속에서 예언을 접하다

한편 미켈란젤로가 항상 흠모하던 시인 단테가 “너 자신의 황제, 너 자신의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세속과 교회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고독하게 은자처럼 자신의 길만을 따라 걸었다. 그가 활동했던 15세기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악취가 흑사병처럼 번지던 때였는데, 이때 불같은 열정으로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조한 예언자가 나타났다. 도미니코회 수도승이던 사보나롤라는 사자와 같은 열정으로 형식화된 전례와 부패한 교회에 맞서 싸웠다.

사보나롤라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장려하기보다 파괴하는 데 적당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예배를 소멸시켰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로마에 오신다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사람들”이라며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음란한 교회’의 개혁을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 용감한 사람을 파문하고, 붙잡아 공공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한 뒤 시신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사랑을 해치는 자가 파문당한 자!”라는 말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사보나롤라를 마음으로 지지했으며, 요제프 슈니처는 미켈란젤로가 “사보나롤라의 눈으로, 그의 시신을 태워버린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비추는 빛 아래 성경을 읽었다”고 적었다. 사보나롤라의 성직자 비판을 받아들인 미켈란젤로는 이런 시를 썼다.

그들은 성작을 녹여 투구와 창을,
십자가와 못을 녹여 칼과 방패를 만들게 합니다!
오, 주님, 돈을 벌기 위해 당신의 피를 주전자에 담아 팔려고 내놓았습니다. 
로마에서는 당신의 인내도 지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발터 니그는 “예언자는 무섭고 두려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예언자가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한 시대에 예언이 일어나지 않고, 어떤 표징도 볼 수 없다는 것은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예언의 중단은 하느님의 침묵”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묘지의 정적이다.

‘예레미야’, 1508~1512,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여기서 발터 니그는 예언자를 ‘불편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가치나 관념을 파괴하는 폭발력 있는 말들을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내던지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모든 것이 위협 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꺼리고 조소하며 추방한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살아 있을 때는 그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다가 그들이 죽고 나면 비로소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더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사보나롤라를 통해 예언자를 발견했다. 그에게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놀라 일어선 사람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쳐 온 힘으로 백성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분노하는 에제키엘과 ‘얼음같은 고독’에 싸여 있는 예레미야를 그렸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한 재앙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그는 아직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예루살렘의 폐허 한가운데 앉아서 오랜 세월 억누른 흥분과 서글픈 탄식을 토해 냈다. 예레미야는 종교적 우울로 인해 굽은 상체를 하고, 엇갈린 다리를 하고,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단단한 고독’을 감당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 벌거벗은 종교 … 그리고 나는?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통해 성직자 교회에 예언이 절박함을 환기시켰다.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절망한 예레미야의 심경으로,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을 그려 과거와 현재의 인류를 심판했다. 이 천장화에서 수염이 없는 그리스도는 위협적인 몸짓으로 천둥 같은 심판을 거행한다. 말년에 미켈란젤로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교회개혁의 지지자 비토리아 콜론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는 온유함 그 자체로 오신다. 어진 마음, 부드러움, 그리고 자비만을 드러낸다. 그분은 죄인과 약자들에게 평화의 빛, 그리고 은총을 주기 위해 오신다. 그분은 연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시며 겸허하시다. … 그러나 두 번째로 오실 때는 무기를 들고 당신의 정의와 위엄,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보여 주신다. 그러면 더이상 자비의 시간은 없으며 은총의 공간도 없다.”

‘최후의 심판’, 1534~1541,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는 단죄 받은 이들이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교회를 하느님 은총의 중개자로 예찬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는 모두가 벌거벗은 채 그리스도 앞에 노출되어 있다. 속내가 다 드러나는 최후 심판이 당대 성직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반발을 일으켰다. 이 그림을 본 교황의 의전관이 “거룩한 장소에 상스럽게 온몸을 드러내는 나체가 웬말이냐. 이것은 교황의 성당이 아니라 목욕탕이나 음식점에 어울릴 그림”이라며 흠을 잡았다.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의전관이 나가자마자 그를 지옥에 있는 미노스로 그려넣었다.

미켈란젤로는 옛날 아담이 나뭇잎으로 가린 것처럼 남의 눈을 속이는 옷은 심판의 날에는 없을 것이라며, 그날에는 모든 존재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느님의 재판석 앞으로 나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이 그림이 논란이 되어 훗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벌거벗은 몸은 모두 옷으로 덧칠되었다.

그림으로 예언을 하던 미켈란젤로는 평생 은수자처럼 살면서 “최후의 심판 때 나는 넘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날에 오른편에 서기 위해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고심했다. ‘최후의 심판’에서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겨진 살가죽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복음이 실종된 시대, 복음과 상관없는 교회에서, 이 끔찍한 자화상은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지금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서 여전히 묻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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