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대오 “다 그분 덕이지. 세상에 거저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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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대오 “다 그분 덕이지. 세상에 거저가 있겠어.”
  • 한상봉
  • 승인 2019.05.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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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2,49-13,5: 성서의 조연들-30

그분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해서 당신을 따라다닌다고 흠씬 얻어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어차피 그분 잘못도 아니고, 그건 분명 제 일이었으니까요. 얼마 전부터 군중들 뒤에 서성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디 가나 빈정대는 양아치 같은 녀석들이 있는 법이지요. 그네들은 앞에 나서서 따져 묻지도 못하고, 노골적으로 훼방을 놓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구시렁대고, 더러운 이빨 사이로 침을 찍찍 뿌려대는 자들입니다.

그런 녀석들이야말로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어스름에 그분의 말씀이 끝나고, 군중들이 하나둘씩 저녁놀을 등에 지고 패를 지어 돌아나갈때, 제일 만만한 자를 붙잡아 포한을 푸는 자들입니다. 제 별명은 ‘소년’ 입니다. 여느 사내들보다 몸집이 작기도 했거니와 눈이 크고 동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라는 말씀을 듣고 지상에 쌓아놓은 양식이 부족한 저는 적이 위로가 되었지요. 저처럼 없어도 주님의 자비 안에 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느라 자리에서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런 저의 뒷덜미를 잡아끈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내 꼼짝달싹도 못하고 숲으로 끌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고, 또록또록한 눈으로 그분의 소리를 경청했던 탓이며, 제일 나중에서야 먼빛의 눈길로 동료들과 더불어 사라지는 그분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입심도 좋고 힘도 있고 후광이 찬란하기를 기대했지만 한번도 그런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지만 언제 나 생의 뒷전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불쌍한 자들입니다. 예수님 한 마디에 군중이 아하, 탄성을 지를 때마다 입술을 실룩거리던 자들입니다. 출신성분이야 그분이나 저들이나 다를 바 없었겠지요. 소문에 따르면, 예수는 한낱 목수의 아들일 뿐이고, 고명한 랍비들처럼 빼어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지요.

잘난 놈들이 잘난 척하는 것은 봐 줄 수 있지만, 별 볼일 없는 자가 앞에 나서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게 그네들의 지론입니다. 그러니 더욱 가련한 중생들이지요. 그 속내를 알아 채자 저는 맞으면서도 웃음이 비어져 나왔고, 결국 그들의 화를 돋우었을 뿐입니다. 맞으면서 행복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분은 저를 모르지만, 저는 그분을 압니다. 그분은 제게 눈을 맞추지 않으셨지만, 저는 그분의 눈빛을 헤아리고 그분의 말뜻을 심장에 담아놓았습니다.

유다 타대오(Θαδδαῖος, ? - 62년)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다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이며, 타대오는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소(小)야고보와는 형제 관계이며,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인으로서, 축일은 10월 28일이다. 상징물은 책과 곤봉·배이다. 회화에서는 같이 순교한 시몬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유다라고 부르고 있지만(루카 6,16; 사도 1,13),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를 타대오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그에 관한 언급은 유일하게 사도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뿐인데, 총 4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만찬 당시 유다 타대오는 예수를 향해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라고 물어보기도 하였다(요한 14,22).전승에 의하면, 성령 강림 이후 유다 타대오는 시몬과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페르시아 제국 지역으로 가서 포교 활동을 벌였는데, 예수에 대해 설교한 뒤 그 곳의 신상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왔다. 자신들이 여태껏 섬겨왔던 신상이 부서지자 분노한 현지인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포박한 후 죽였는데, 어떻게 순교하였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저는 그분의 동료도 제자도 아니었지만, 저는 그분에게서 밀려나지도 않았고, 그분의 그림자에서 떨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여전히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먼발치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말을 새겨 밤새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말해주고, 아이들에게도 가르칩니다. 어젯밤에 얼굴에 시퍼런 멍을 달고 절룩거리며 집에 들어온 제게 아내가 묻더군요. “뭔 일 있었어요?”그래서 답했죠. “다 그분 덕이지. 세상에 거저가 있겠어.”

그런데 오늘 그분이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제게 눈을 맞추시고 다가와 묻더군요. “무슨 일입니까?” 저는 쑥스러워 그냥 웃었죠. 그분도 안심하는 눈치로 “좋아요, 좋아.” 하시곤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말씀을 꺼냈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되고 싶다는 거였죠. 불을 질러 사람들이 갈라서 맞서게 하려는 것이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서쪽에서 구름이 몰려오면‘곧 비 가 오겠다.’ 알면서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는 위선자들과 주님 앞에서 회개할 줄 아는 자들을 갈라놓으시려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공박하면서 정작 주님이 바라시는 자비와 정의는 행하지 않는 자들과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릴래아 사람들이든 예루살렘 사람이든, 시돈에 살든 암만에 살든, 바리사이든 허접한 가죽장이든, 랍비든 하물며 사제라 해도, 마음을 곧추 세워 겸손하게 예전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다 허사라는 것이지요.

그분은 새로운 가문을 세우려는 것 같았습니다. 피붙이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주님을 흠모하고 사람을 섬기는 백성을 불러 모으려는 것이지요. 지참금도 필요없이, 피를 쓴 맹서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가리라 작심하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려는 것이지요.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지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입니까? 주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자가 곧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생모 앞에서 그 말을 하였다니까, 그분은 참 대단한 분이죠. 그분의 가문에 드는데 건달한테 매 좀 맞는 게 대수겠습니까?

요즘은 하루하루가 기다려집니다. 조금씩 그분께 다가가고, 조금씩 그 뜻을 알아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아멘.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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