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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의 통점(痛點)에서, 케테 콜비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정면과 상부에서 본 피에타

종교예술 가운데 성베드로 대성전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만큼 유명한 작품도 없다. 이 작품은 대리석을 쪼아 피부 속 핏줄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라서 완성하자마자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 누구 작품인지 자랑하려고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상체를 가로지르는 띠에 ‘피렌체의 미켈란젤로’라는 서명을 뒤늦게 새겨 넣었다. 그의 작품 중에 서명이 새겨진 것은 이 작품 밖에 없다는데, 미켈란젤로는 서명 사건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의 서명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페에타>

이 자신만만한 작품이 곧 미켈란젤로의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헌데 말년에 그가 다시 조각한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예전 모습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서로 달라붙어 있는 성모와 예수의 형상은 알 수 없는 슬픔에 짓눌려 있으며, 성모의 부축을 받고 있는 예수는 고문 때문에 고통스럽고 탈진한 모습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모범으로 삼는 균형감을 여기에선 찾아볼 수 없다. 성모는 절망적으로 죽은 아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들의 가냘픈 몸은 형체마저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며, 그의 얼굴은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리스도의 입은 보이지 않으며, 반쯤 감은 눈은 땅을 바라보면서 마치 관 속의 어둠과 안식을 찾는 듯하다. 이 별것 아닌 육신의 껍질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을 담아내고 있다.

이 피에타만큼 복음서에 드러난 그리스도교 정신을 잘 드러내는 작품은 없다. 노년의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그리스도교 정신은 권력, 숭고한 무게, 그리고 위엄과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에는 사람의 아들이 경험하는 통절한 절망과 측은함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서 하느님이 겪은 수치심의 극치를 보았으며, 희생자가 된 하느님이 보여준 밑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애절한 증거를 보았다. 그래서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우리가 정말 거룩한 분과 만날 때 침묵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4일 이승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이 피에타를 쪼고 있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

우리 시대를 위한 피에타

‘무너져 내리는 사람의 형상’ 속에서 예수와 성모를 보았던 미켈란젤로처럼, 자식의 억울한 죽음으로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작가가 있다.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케테의 초기작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죽은 아들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허벅지와 팔 사이에 끼고 절규하고 있는 어머니. 그녀는 아들의 숨결을 다시 불러들이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고, 죽은 아들의 이마에는 역설적으로 ‘은총처럼’ 빛이 내리치고 있다.

“아들 페터가 7살일 때, 나는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을 만들었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내 팔에 아들을 안고 거울 속에 있는 내 자신을 그렸다. 작업은 더뎠다. 나는 너무나 피곤했고 마음이 슬펐다. 그러면 아들 페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될 거에요.’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참혹한 작품은 고스란히 케테 콜비츠의 몫으로 남겨졌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가 후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소피 배공비가 암살되면서 1914년 8월부터 4년 동안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케테 콜비츠의 아들 페터가 그해 10월 22일 전사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1천만 명이 넘는 군인이 죽었다. ‘애국심’ 때문에 한사코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가려는 아들을 케테도 막지 못했다. 이때 케테는 “이 어린 것을 탯줄에서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태어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죽음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2014.10.5.)라고 일기에서 한탄하고 있다. 아들이 죽자 케테는 ‘국가주의’를 더욱 경멸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케테 콜비츠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폴란드에서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커다란 나무십자가가 있었다. 포탄이 날아와 십자가의 윗부분과 가로막대를 박살냈다. 그리스도는 그대로 매달려 계셨다. 격앙된 군대가 있는 전쟁터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매달려 계셨다.”(2015년.2월)

케테 콜비츠는 아들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더 불쌍해졌다. 엄마로서 삶은 이제 다 끝났다. 가끔 나는 그 시절이 미치도록 그립다. 그 아이와 전처럼 춤을 추는 것도 다 지나간 일이다. 봄이 와서 페터가 꽃을 가져오면, 우리는 함께 봄날을 만끽하며 춤추곤 했는데”(1916.1.17.)라고 회상하는 케테는 그래도 자신에게 ‘일’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런 심경으로 그린 작품이 <어머니들>(1919)이며, 페터의 묘지 근방에 있는 로게 펠데에 있는 군인 평화묘지에 세워진 조각 <비통한 부모>(1932)이다. 그리고 베를린 무명용사 기념관에 전시된 조각 <피에타>(1937)이다.

 

케테 콜비츠 〈비통한 부모〉 1932
<피에타>(1937)

그러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콜비츠는 손자마저 잃는다. 그녀의 장남 한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죽은 동생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손자 페터마저 1942년 9월 22일, 러시아에서 전사한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1942)라는 작품은 더 이상 우리들의 ‘페터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케테 콜비츠가 그린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마치 암탉이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감싸 안고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할 겨를이 없다. 이제 자식들을 품안에서 단단히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의지가 엿보인다. 통상적인 피에타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긴 정적인 모습이었다면, 우리시대의 피에타는 자식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1942)

사회주의자, 케테 콜비츠의 가족들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1809-1884)는 고귀한 품성을 지닌 신학자이며 자유주의 신앙을 지닌 개신교 목사였다. 그는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신앙 때문에 기성교단의 박해를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테의 아버지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품는 것은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계속 ‘국가의 공복’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법관생활을 청산하고 미장이의 삶을 선택하였다.

케테는 쾨니히스베르크와 베를린 여자예술학교, 뮌헨 등지에서 미술 공부하다가 1891년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칼 콜비츠와 결혼해 북부 베를린에 자리 잡고 살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 칼 콜비츠는 의료보험조합 소속 무료진료소 의사였다. 여기서 케테는 하층민들의 고통과 불행에 다가갈 수 있었다. 온화한 성품의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은 혁명적인 행동가는 아니었지만, 개혁적이며 다정했다. 당대의 작가들보다는 괴테와 미켈란젤로를 좋아했던 케테는 높은 교양을 갖추었지만 소시민의 겉치레와 꾸민 말투와 과장된 태도를 경멸하였다. 한편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 토론그룹에도 참여하면서 꾸밈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노동자 브라운은 기묘하게 보이는 친구이다. 완전히 혼동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머리가 무거워 보인다. 코 밑으로는 입 주위로 잔주름이 깊이 패여 있으며, 눈은 무언가를 궁리하는 듯하면서도 멍한 표정이었다. 작고 뚱뚱한 몸집에 넓은 어깨와 짧은 팔을 가졌다. 그리고는 그 넓적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앉아 있는 것이다.”(일기, 1921. 여름.)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농민전쟁

케테 콜비츠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참상에 눈을 뜬 것은 1893년 2월에 초연된 게르하르트 하루프트만의 연극 <직조공들>(Die Weber)을 보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1844년에 발생한 직조공의 봉기를 소재로 한 것이었고, 황제 빌헬름 2세는 이 즈음 담화문을 발표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제국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인사들”이라고 통고하며 서둘러 파업 주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법을 서둘러 제정했다.

<회의>

혁명적 투쟁을 예고하는 이 연극을 계기로 케테 콜비츠는 6막극처럼 여섯 점의 판화로 ‘직조공들’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두 점은 직조공 가족의 빈곤과 삶을 위협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그리고 봉기를 모의하는 <회의>를 거쳐 <직조공들의 행진>(1897)이 이어진다.

행진을 하며 몇몇은 주먹 쥔 손을 높이 흔들고, 다른 사람은 입을 굳게 닫은 채 도끼를 들고 있다. 어떤 부인은 잠든 아이를 등에 업고 간다. 다섯 번째 작품은 악독 사업주의 집을 습격하는 <돌격>이다. 여자들의 손은 흥분과 단호함으로 보도블록을 떼어내 남자들에게 나른다. 비극적 결말은 총 맞은 봉기자들의 시신이 옮겨진 어느 직조공의 방이다. 한 부인이 슬픔을 속으로 삼키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지만, 방으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로 들어온다. 희망의 빛이다. 이 연작 어디에도 기업주와 같은 억압자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직조공들 편에서 그들의 모습만으로 연대와 형제애를 고백한다.

 

<행진>

 

<돌격>

 

<결말>

이 작품으로 케테 콜비츠는 ‘사회적 여성예술가’로 인정받아, 1898년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당시 케테의 <짓밟힌 사람들>(1900)은 케테 스스로 “성당 장식그림의 좌측에 위치한 석판화”라고 부를 만큼 ‘성가족’처럼 보인다. 출구 없는 가난한 노동자 가족이다. 고개를 수그린 아내는 투박한 손으로 쇠약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남편은 얼굴을 돌린 채 단 하나의 위로인양 끈을 내밀고 있다. <폭동>(1899)과 <폭발>(1903)은 봉기를 위한 집단적인 의지를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폭발>에서는, 한 여인이 ‘자유의 여신’처럼 낫과 도끼를 들고 격양되어 물밀듯 앞으로 치닫는 무리들을 선동하고 있다.

 

<폭발>

케테는 당시 역사가 빌헬름 침머만의 <농민전쟁>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농민들을 선동하였던 여자농부 ‘검은 안나’를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결국 참기 힘든 농민들의 상황을 묘사한 <밭을 가는 사람들>(1906)로 시작되는 ‘농민전쟁’ 연작 판화를 새기게 된다.

이 판화는 <억압>(1907), <날을 세우고>(1905), <무장>(1906), <전투>(1907), 그리고 <잡힌 사람들>(1908)로 이어진다. ‘직조공들’ 연작처럼 ‘농민전쟁’의 결말도 음울하다. 결박당한 농민들이 마치 짐승처럼 한곳에 몰려 있다. 그러나 운집한 농부들 사이에서 한 아이가 부각된다. 이탈리아 여행 후 종교예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 판화에서 그 아이는 지금 비록 비천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 미래의 씨앗이다.

 

<밭을 가는 사람들>

 

<날을 세우고>

 

<잡힌 사람들>

민중의 고통은 나의 고통

<케테 콜비츠>(실천문학사, 1991)에서 카테리네 크라머는 “케테 콜비츠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 자신이 고통스러웠으며, 타인의 열망과 기쁨이 곧 자신의 열망과 기쁨으로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풍자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에 판화를 게재했는데, 이 판화들에 주점과 길거리, 임시숙박소 등에서 본 대도시의 비참함을 담았다. 그녀는 삽화 같은 사소한 판화에서 보편적이고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통찰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난의 형상들’이라는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가내노동>은 피로에 지쳐 책상에 앞드려 잠든 부인을 통해 기아 임금으로 노예화 되고 파괴된 생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내노동>

케테는 주간지에 판화를 게시하면서 신속하고, 대중적이며,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녀는 친구 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도시 생활의 무수한 비극들을 다수 대중 앞에서 더 자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유달리 이 작업에 애착을 느끼도록 하였다”고 썼다.

케테의 작품은 표현이 강렬해서 보는 이들의 감정을 일깨우기 때문에, 보는 이가 반발하거나 그 속에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케테에게 예술 자체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인간의 운명과 그 미래였다. 그래서 항상 구체적인 사회현실에서 자신의 재능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삶과 예술에서 언제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 섰으며,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진보적 투쟁에 동참하였다.

혁명보다 평화를!

1916년 1월 2일 일기에서, 케테 콜비츠는 “사람이란 불행을 겪기 전에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순전히 자기 의지로 변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1914년 아들 페터가 전사하면서, 그녀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 슬픔과 전쟁으로 인한 고난 때문에, 케테는 비로서 카프카가 말한 ‘종교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20년대 이후 그녀의 일기에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내내 흐르고 있다. 케테는 집안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기성교회를 반박해 왔지만, 종교나 신앙 자체를 반박하지는 않았다. 특히 자식을 잃고 나서는 ‘성경’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1915년 신학교에 들어간 아들 한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요즘 성경을 읽고 있다. 그러나 옛날 어머니들이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읽는다. 내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다. 지금 나는 그것의 위대함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녀는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다”고 했다. 한스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케테는 “하느님의 말씀을 좀 들어보렴.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고 했다. 그 열정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일곱 개의 목판화를 연이어 새겼다.

 

전쟁연작-부모들, 1920


1924년에 판화를 완성하면서 평화주의자였던 작가 로맹 롤랑에게 편지를 띄웠다.

“나는 전쟁을 형상화 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을 어느 정도 말해 줄 목판화 시리즈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일곱 개의 판화입니다. 그 제목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어머니들’ ‘과부들’ ‘민중’입니다. 이 그림들은 마땅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옳습니다.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참담한 과거를!”(1924.11.25.)

이 목판화 시리즈에서 두드러진 것은 ‘여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인들은 고통을 겪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고,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고 있다. 케테는 여성으로 전쟁을 겪었으며, 어머니의 본능으로 반전평화를 바라는 예술에 몰두했다.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그녀의 입장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목판화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1920)이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창설했으며, 로자와 더불어 1919년 1월 15일 같은 날 살해당한 리프크네히트의 가족들이 케테에게 찾아가 그의 시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케테는 군인들이 그를 살해한 사실에 분개했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판화 작업을 맡았다.

케테는 “갑자기 나는, 진정한 혁명가들이 무슨 일을 수행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좌파들의 끊임없는 압력이 아니라면 혁명도 없었고, 군국주의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철저하고 자립적인 사람들, 스파르타쿠스 사람들이 오늘날의 개척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에 케테 콜비츠가 전적으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판화를 마칠 무렵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 때 나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트를 꿈꾸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퍼져있는 증오에 이제는 몸서리가 난다.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사회주의 사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 버렸다. 이 지구상에 세워질 공산주의 사회는 신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소심하기 짝이 없고 마음속으로도 늘 회의한다.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1920.10월)

그렇다고 케테가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앙은 사회주의를 동반한다. 1920년 7월 8일 열린 막스 클링거의 장례식이 끝나고 예나에 있는 성당에 방문한 소감을 케테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성가대석에서 본 성인상들은 정말 멋이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아름다웠다. 칼(남편)과 와 나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가톨릭신앙으로 통일되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유럽은 국경을 초월해 모두 하나였다. 이 일치된 신앙의 힘으로 교회들이 생겨났고, 그곳에서 모든 예술이 내용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종교가 몰락하면서 이런 연관성은 상실되었다. 결국 우리는 조형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초라한 전시회나 다니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통일성은 오직 사회주의만이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게 언제일까? 앞으로 몇 세대가 더 지나야 가능할까?”(1920.6.9.)

나치의 박해, 그리고 아쉬운 죽음

전쟁은 이제 그만!(Never Again War, 1924). 케테 콜비츠의 반전 포스터로, 1924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중부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 청소년대회를 위해 제작한 석판화.

독일에서 제국 선거를 앞둔 1932년 7월 18일에 케테 콜비츠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만, 아놀드 츠바이크 등과 함께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모든 좌파들이 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으로 선출된 후 1933년 2월 5일 두 번째 긴급호소가 발표되었다. “지금 이 순간 파시즘을 거부하는 모든 세력들이 원칙에 상관없이 결집되지 않는다면, 독일의 모든 개인적, 정치적 자유는 곧 압살될 것이다.”

나치정권아래서 반역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예상대로 케테는 예술아카데미에서 탈퇴하도록 강요당했고,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 수입을 잃었다. 작품들은 철거됐으며 전시회는 금지되었다. 비밀경찰의 협박과 심문은 물론이고, 공공연한 가택수색도 이어졌다. 이뿐 아니다. 케테는 51년 동안 콜비츠 가문이 살았던 베를린의 집에서 쫓겨나 노르트하우젠으로 강제이주까지 당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스의 아들이며 케테의 손자인 페터마저 전사했다는 소식이다. 케테가 남긴 마지막 조각이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1943)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어서 두 번씩 가슴에 묻어야 했던 생때같은 자식과 손자. 콜비츠가 슬픔을 딛고 분연히 일어나, 외치듯 만든 작품이 마지막 석판화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였다. 당시 콜비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망아지처럼 바깥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이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콜비츠는 1945년 4월22일 77세로 이승을 떠났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전쟁을 두 주일 남겨두고서였다. 1944년 7월 그녀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겨두었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 주엇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 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 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나갔다.”(1944.7월)

 

케테 콜비츠 자화상

본질적인 인간이 될 것

케테 콜비츠는 생애 동안 1백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자기 작품 속에서 자기 얼굴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자기를 묘사하려는 이런 충동을 자기연민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온 마음을 기울여 작업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활동은 스스로 “본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자화상은 단순히 사적인 흔적이 아니라, 그가 표현하던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닮아갔다. 그곳엔 감상이 없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서 우리는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녀 말마따나 그 작품을 미워하거나 빠져들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여성’ 또는 ‘어머니’가 있었다. 가혹한 노동 속에서, 농민봉기의 한가운데서도 여인은 언제나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받고, 그처럼 고통 받는 이들을 끌어안고, 마침내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존재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에서 성모 마리아를 고요한 혁명을 일으키는 복음화의 별이라고 불렀다. 이 고요한 혁명은 사실 살해당한 아들 예수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통점(痛點)에서 비롯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시작된 통점은 케테 콜비츠에서 다시 확인되고 완성된다. 주여, 우리를 가련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참고] <케테 콜비츠>, 카테리네 크라머, 실천문학사, 1991
[출처] <가톨릭평론> 2019년 5-6월호 원고 수정보완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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