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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자기만족은 금물이며 자화자찬은 독[부활 제4주일; 2019.5.12] 사도 13,14.43-52; 묵시 7,9.14ㄴ-17; 요한 10,27-30/ "나는 착한 목자다": 사목의 향기와 성사의 품위

1. 부활 제4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는 오늘을 성소 주일로 지냅니다. 성소 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바오로 6세 교황이 지정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할 사제, 수도자, 선교사의 성소는 물론이요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 성소의 기반이 되는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 등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듣고 있는 부르심을 확인하고 이에 잘 응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어느 특정한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전체 공생활을 포괄적으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지만 대다수의 유다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따라서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한 극소수의 유다인들만이 그분을 알아 뵙고 믿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알아보고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한상봉

3. 율법에 열성적이었던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맞이하지도 않았던 유다인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박해자로 살아가려던 삶을 극적으로 전환하여 사도요 선교사로 살아간 특별한 성소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바오로도 처음에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면서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을 먼저 찾아다녔습니다. 그 방식은 유다인들이 모이는 안식일에 회당에 찾아가서 설교를 자청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제법 많은 유다인들이 돌아서고자 했지만, 이를 시기하는 일부 유다인들이 박해를 가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의 바리사이들이 자기들의 옛 동지로서 배신자가 된 바오로를 감시하고 방해하기 위하여 사방에 사발통문을 보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기울이려는 낌새를 보일 때마다 유력한 유다인들이 방해했습니다. 결국 바오로는 동족 유다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방인인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로 선교의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선교성과도 풍성하게 거두었습니다.

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직제자 출신이지만 제자들 가운데 제일 어린 막내였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가 소아시아 지방에서 세워놓은 공동체들을 이어 받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특히 가장 큰 선교적 성과를 거둔 에페소를 중심으로 여섯 공동체를 맡아서 선교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했기 때문에 요한은 박해받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이 유배된 파트모스 섬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박해자들에게 탄압당할 수도 있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묵시 문학적 기법으로 쓴 이 편지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고 치명한 증거자들이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5. 사도 바오로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이심을 증언합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린양’이신 그분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목자이시고, 그것도 ‘착한 목자’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이자 ‘착한 목자’이시라는 증언은 오늘날의 사제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희생을 봉헌하려는 지향으로 신자들에게 착하게 사목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저는 이러한 증언 속에 사목의 향기와 성사의 품위를 간직하라는 시대적 요청이 담겨 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만성적인 부족 사태를 보이고 있는 성소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역시 사목의 향기를 풍기고 성사의 품위를 드높이는 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착한 목자의 길은 자기비허의 십자가에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사도 요한도 이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써 착한 목자상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증거가 후대의 성직자,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성직자이건 수도자이건 평신도이건 얼마나 이 자기비허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느냐에 예수 추종의 실력이 판가름납니다. 이 실력은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교회, 각 지역의 교회에게도 엄중하게 해당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교는, 성전 권력을 장악하여 종교관료로 위세를 부리던 사두가이와 율법을 장악하여 지식 권력으로 세도를 부리던 바리사이 모두, 자기비허의 삶을 살기는커녕 이 자기비허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형편없는 실력 수준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비허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모범은 착한 목자로서 보여주실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주신 것이었고, 사도 바오로와 요한의 증거는 일생과 목숨을 바치는 삶으로서 예수 추종의 최대한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7. 요한을 비롯한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부르셨고, 바오로는 부활하신 후에 부르셨습니다. 성소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자세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에 함께 일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셨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일이므로 당신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꾼들을 부르셔야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소자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일꾼입니다. 그리고 먼저 부르심에 응답한 기존의 성소자들, 즉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일꾼들이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도직 태도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성소자 상태가 좌우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에서 마련된 그릇의 크기에 의해 담기는 물의 양이 달라지는 이치와도 비슷합니다. 그릇이 크면 많이 담길 수 있지만 그릇이 작으면 적게 담길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소자 문제에 있어서 열쇠는 하느님이 쥐고 계시지만,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일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께 좋을 것이기 때문에 성소자를 부르시려는 하느님의 뜻과 자비는 풍성하다고 보아야 하고 이는 상수입니다. 성소자를 부르시려는 하느님의 뜻과 자비가 모자라서 성소자 부족 사태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성소자들인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일꾼들이 수행하는 사도직 활동의 자세로 말미암아 달라지는 그릇의 크기가 변수입니다.

8. 그래서 기존 성소자들의 전체 집합인 한국 가톨릭 교회가 보여주는 사목의 수준과 집행하는 성사의 품질이 관건입니다. 박해시대가 끝나고 개항기에 선교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부터 한국 가톨릭 교회의 양적 성장이 시작되었고, 특히 80년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교세의 양적 팽창 현상은 두드러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나라 모든 지역과 모든 계층에까지 천주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알려져 있습니다. 몰라서 믿지 못하는 경우는 이제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교회와 기존 성소자들이 증거하는 사목의 수준과 성사의 품질입니다.

9.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추종하는 현 실력이 과연 어떠한지, 그 좌표를 점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오로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기비허의 실력이 최대한을 증거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형식상으로만 구색을 갖추어 예수 추종의 실력이 최소한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목 활동에 복음의 향기가 풍기지 않고 관료주의가 난무하는 것은 아닌지, 성사를 집행함에 있어 요식행위가 횡횡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자본숭배풍조를 성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물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찾아오는 사람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인격적 의사소통과 공감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행여나 예수님 시대의 사두가이들에게서 보여진 직업적 종교관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아닌지, 또는 경건한 척 하지만 위선적이었던 바리사이들에게서 발견된 권위주의적 처신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냉정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10. 아직까지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성소자가 거의 끊어져버렸다는 유럽 대륙이나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가톨릭 교회, 아시아 대륙의 일본이나 대만의 가톨릭 교회에 비하면 우리 교회의 사정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입니다. 교세 감소 추세가 이미 굳어졌다고 아우성치는 불교의 여러 종파나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는 좋은 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성적이어서 절대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지난 7,8,90년대의 성장세에 비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성소자 감소 현상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예수 추종 실력에 대한 하나의 경종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우리 교회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점검해야 합니다. 도무지 평가라는 작업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 교회가 이제는 냉정하게 자기를 평가해야 합니다.

자기만족은 금물이며 자화자찬은 독입니다. 매일같이 봉독하고 묵상하는 복음이 자기평가의 잣대요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양떼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목활동이 인격적 향기를 풍길 수 있어야 하고, 성사 집행이 복음적 품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파견사제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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