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 신부 "예수의 길에서, 핵심은 가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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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우 신부 "예수의 길에서, 핵심은 가난입니다"
  • 정일우 신부
  • 승인 2019.05.1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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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교회인가?-2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상대적인 가난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지요. 저는 성탄절에 구유 앞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이 아주 가난하다는 데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더 가난하면 좋겠다는 이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정말 사회의 찌꺼기, 맨 밑바닥에 있는 제일 가난한 사람이었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지만,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요셉은 기술이 있었고 실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 할 때 요셉과 마리아가 먼 길이었지만 베들레헴까지 갈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보면 매년 한 번씩 올라갔다고 합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면 1~2주 걸리는 여행을 매년 하지는 못했겠지요. 하여튼 예수님은 문맹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맹이 흔했을 텐데, 예수님은 분명히 교육을 받고 글을 알고 쓸 줄 아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중산층은 아니더라도 아주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시지 않았다는 거죠.

 

by Del Parson.

예수는 광야에서 단식하실 때 절대적인 가난을 고의로 택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할 수 없이 당하는 가난과 자발적인 가난은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내적으로 종교적으로 아주 충격적인 체험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서 예수님은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광야로 나갔습니다. 충격적인 체험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아버지로부터 내가 받은 사명이 좀 더 뚜렷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실천해야 되느냐?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은 갈등도 고민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당신 인생에서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거죠. 당신 사명이 우선 동포들, 그 나라 모든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께 다시금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이 사업은 민중과 함께 하는 거대한 사업이었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세상 이치대로 이 세상의 힘을 빌어가지고 할 것인지 갈등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인 사회운동을 하려면 우선 돈이 필요하잖아요. 사무실도 필요하고, 사람도 써야 하고. 게다가 굉장한 조직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어떻게 하면 성공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 거지요. 이 세상의 경제적인 힘, 사회적인 힘, 정치적인 힘, 종교적인 힘을 빌려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냥 빈손으로, 맨발로, 알몸으로 할 것인가? 즉 세상의 이치대로 할까, 하느님의 이치대로 할까 하는 고민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빈손으로, 맨발로, 알몸으로 뛰기로 하셨습니다. 즉 절대적 가난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사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이 세상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 그러냐? 좋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는 몇 마디 속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초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 주무셨습니다. 초대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그냥 노천에서 주무시고,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굶었습니다. 이런 가난이 그분에게 자유를 주었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즐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은 삶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난을 택한 이유는 뭐든 눈치 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겠지요.

예수님 별명 아시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술고래와 먹보”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잔치 집에 자주 가는 사람’으로 보여졌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집도 잘 가셨습니다. 그것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청빈’은 아주 딱딱한 무슨 이념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청빈허원을 한 사람은 ‘택시를 타면 절대로 안 됩니다’라는 규칙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죽어도 택시를 안 탑니다. 그래야 청빈허원을 잘 지키는 줄 아는데 그것은 억지입니다. 탈 때도 있고, 안 탈 때도 있죠.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하려고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부자 집에 안 간다.’라는 그런 굳어진 마음이라면 ‘가난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념이고 벌써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념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난함도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는 있는 사람은 물론 없는 사람도 나누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누라고 했습니다. 나누면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실 때 사람들이 겁이 나서 말세가 되는 줄 알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급하게 물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그중에 한 벌을 주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옷 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속옷까지 주라.” 하셨습니다. 농담 같지만 나눔에서 세례자 요한이 50퍼센트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100퍼센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이 뭐가 있느냐, 얼마나 있느냐?” 하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에도 많은 양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우선 너희들이 먹을 것을 먼저 내놓아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넉넉한 곳에서 조금씩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곳에서부터 나누라, 부족한 곳에서부터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족한 곳으로부터 나누면 기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조건으로 가난을 요구했습니다

복음서에 가끔 나오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건을 말씀하셨습니까? 대졸이냐. 고졸이냐? 물어보지 않았죠. 족보와 가문과 출신지방 등 사회적 조건을 따지지 않으셨고, 심지어 사상도 종교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오라’는 거죠. 다른 조건은 없어요. 요즘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으면 다 팔고 돈을 ‘나에게’ 가져오라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 돈을 남에게 주고 그 다음에 나에게 ‘빈손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유일한 조건이 빈손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요구하셨습니다. 실제로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 등 제자들이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이건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여튼 이런 요구를 한 예수님도 대단하고, 그대로 한 제자들도 대단합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도 이게 핵심이란 걸 잘 알았습니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많이 달라졌죠.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있는 것을 다 팔고 남에게 모두 주라 했는데, 교회에서는 남에게 안 주고 끼리끼리만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퇴보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가난과 나눔’이 복음의 핵심적 요청이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 교회와 신앙생활의 핵심인 성체성사도 가난으로 초대합니다

완전히 닫힌 교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고 험하니까 이 세상과 동떨어져 우리끼리 이 안에서 돌면서 우리끼리 기도하고 우리끼리 천당 가자. 이 세상과 가능한 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교회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들어오는 교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긴 하지만 무조건 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선물 주듯 하고 다시 들어옵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교회가 자선사업 할 때도 ‘교회에 나와라, 세례를 받아라.’ 합니다. 조건을 붙여서 뭔가를 합니다.

참된 교회는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조건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게 ‘성체’입니다. 이게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을 들고 “내 몸이다. 먹어라!” 포도주를 들고 “내 피다. 마셔라!” 합니다. “나를 먹어라.”는 엄청난 말인데도, 우리는 교회에서 너무 자주 듣는 말이기에 무심히 지나칩니다. 예수님이 “나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 저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네 안에 들어가 살고 싶다.”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나는 구세주고 너를 구해야 한다. 그러니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주는 거다. 이런 입장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등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겁니다. 이게 진짜 사랑이지요. 이 사랑은 완전히 주는 것이고, 몽땅 주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주는 게 아니라 몽땅 주고서, 조건도 달지 않아요.

‘밥’을 생각해 봅시다. 밥이 있는데 그 밥을 먹으면 밥이 없어지죠. 이 밥이 완전히 내 것이 되죠. 내 안에 있는 밥이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완전히 우리에게 주셨는데 아무 조건 없이 주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날 이렇게 쓰라. 아닙니다. 마음대로 쓰라고, 나는 이제 너희들의 것이니 나는 없어지고 너희들이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 없이 주자는 게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조건 없이 나를 주고, 남의 밥이 되고, 남에게 이용당할 때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사실 성직자 수도자라면 더더욱 언제나 이용당할 마음을 먹어야지요.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잘 써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써먹도록 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그런 것입니다. “나를 쓰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자료제공] 천주교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정일우 신부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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