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대장,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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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
  • 한상봉
  • 승인 2019.05.0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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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8,5-13; 27,45-54, 성서의 조연들-27

내가 그분을 만나고자 한다면 먼저 계급장을 떼어야 하겠지요. 내가 달아본 계급이라야 ‘백인대장’에 지나지 않지만, 이젠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야 그분을 부끄럼 없이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제가 이미 군복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라던 바는 창검이 아니라 마음으로 갈망해야 닿을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와 군대가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무력함 안에서 사랑으로 평화를 나누어 가지는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맨 맘으로 벌거벗고 달려가야 만져지는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빈손으로 맨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저는 그 현장에서 그분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이 유언처럼 지르던 비명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마지막 희망마저 놓아버린 순간이었지요.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처음엔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분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저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나중에야 다른 유다인들에게 뜻을 물어, 그 말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자가 지르는 유서 깊은 절규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들 유다인들이 즐겨 암송하던 ‘시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 하십니까?”

그 절망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분이 숨을 거두자 먹구름이 언덕바지를 숨 막힐 듯 찍어 누르고 돌풍이 일었습니다. 이 범상치 않은 일들을 보며 저 역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전 그분을 처음 만났던 일을 기억해내고는 애를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카파르나움에서 근무하던 때였습니다. 제 종 가운데 중풍에 걸린 자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우리 집 식솔이라서 그의 불행을 매몰차게 모른 체 할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그깟 종놈 때문에 위신을 더럽힌다고 만류하였지만, 글쎄요, 제 마음이 약해서인지 뭔가 도와줄 방도를 찾고 싶었죠. 그 참에 예수라는 사나이가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신묘한 손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나는 유다의 신을 믿지 않지만,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세상엔 기적도 없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용기를 내어 부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단지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소.”라고 운을 떼었을 따름인데, 그가 선뜻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겠소.”하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미워하였는데, 이렇게 기꺼운 반응을 보이니 오히려 내 발걸음이 뒤로 멈칫 물러서는 걸 느꼈습니다. 내 표정을 읽었다는 듯이 그가 싱긋 웃어보였습니다.

그는 이미 나를 압도하고 있었고, 품었던 긴장을 풀어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직감으로 알아챘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있는 내 종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앞에서 이리도 당당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로마의 군인이기 전에 병고에 시달리는 종의 아픔을 안쓰럽게 여기는 주인일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대개 유다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달갑지 여기지 않았습니다. 불결하다는 것이지요. 그에게 그런 민망함을 안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주 겸손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인이고, 당신을 우리 집 지붕아래 모실 자격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하시라고, 그것으로도 족히 내 종이 병고에서 헤어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이 말했습니다. “믿어줘서 고맙소! 당신 같은 믿음을 어디서도 본 일이 없소. 당신이 믿는 대로 될 것이오.”

그는 이미 어느 경계를 넘어선 사람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유다인도 로마인도 없었습니다. 자유인도 노예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서 ‘사람’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이 그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이 되게 한 모양입니다. 그는 유다인들이 로마인보다 더 징그럽게 손을 털고 멀리하는 병자들을 돌보았고, 부랑자들처럼 그들 속에 섞여서 잠을 청하고 밥을 빌어먹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일 줄 알았습니다.

이제 나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늙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그 분의 제자들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들을 도울 방도를 다시 찾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람이었음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새삼 새록 이를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그분이 다시 살아오기라도 한 듯이, 그분처럼 처신하고 그분처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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