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화된 복음: 소비하는 만큼 존재한다
상태바
상품화된 복음: 소비하는 만큼 존재한다
  • 존 프란시스 카바나
  • 승인 2019.04.01 1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6

상품화된 삶의 방식 속에 있는 분명한 가치관들은 시장성과 소비다. 이 두 가지 가치관들은 마치 도덕적인 렌즈와 같아서 우리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규정짓고 있다. 이 가치관들은 우리 자신의 이해에 대해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조작과 공격적인 태도), 우리의 지식(양적으로 생각하고 관찰과 계산 중심의 사고), 우리의 애정표현(어물쩍하고 기계적인 성생활 등)을 결정짓는다.

미국식 동화,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하다는..

몇 년 전에 한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즉 아메리카의 청소년들은 “아메리카식 동화이야기”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사례를 읽어보자 :

15살난 에이미는 학교에서 항상 “A" 학점을 받았다. 어느날 B학점을 받아왔을 때 그의 부모는 굉장히 화를 냈다. 에이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실패하면 내 자신이 되는 것에 실패하는 것과 같지요”. 이 글은 에이미가 자살하면서 남겨 놓은 글 중의 일부였다.

“미국식 동화이야기”는, “두 가지 주제로 시작됩니다. 즉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이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사람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주제입니다”하고 위의 정신과 의사는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또한 상품문화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사랑을 배워야 할 가정에서 오히려 경쟁하는 것을 배우고 이기고 증명하는 것을 배운다. 교육에서도 가치관은 오로지 생산성, 양적인 등급, 경쟁력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에서도 신자수와 성소자수의 증가에 따라 평가된다. 직업에 있어서도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소모되면 은퇴시켜 버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시장성이 있어야 한다고..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시장성이 왕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학위, 기술, 재능 그리고 역할 등이 우리의 생산과 인격체가 지니고 있는 예정된 퇴화에 대항할 수 있는 보증물로 어릴 적부터 인식되어 왔다. 생산적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쓸모없고 가치없는 존재가 된다. 굶주린 벵갈사람이나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 혹은 다섯달된 귀찮은 태아일 적에 우리는 원치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자신이 대체될 수 있다는 폭력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아이들은 삶에서 첫 번째 의미격하의 예감을 느끼게 되며, 시장성이 끝났을 때 은퇴노인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폐기물이 되었다는 상실감 또한 엄청난 의미격하의 결과인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실제로 인간의 고유함과 대체될 수 없는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인격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얼마나 시장성이 있거나 생산적인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생산물이 인간의 가치를 강화시키고 표현해 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의미가 오로지 상업성과 생산에 의하여 좌지우지된다면, 우리의 목표와 가치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살 수 있으며 팔 수 있는가에 따라 혹은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는가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다.

한 개인이 존재하는 고유한 방식은, 알고 사랑하는 데 있어 되풀이 될 수 없는 자질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하여 반복될 수 없는 고유한 방식으로 삶과 연결된다는 것은 더구나 물질에 의한 방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자질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생산성과 시장성에 있을 때 불가피하게 사라져 버린다.

인격적인 가치의 격하를 합리화시키는 상품문화는 밑바닥에 있는 덜 중요하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불만들에 작용하는, 숨어있는 기준이기도 하다. 고도로 전문화된 시장은 전문적인 잡지들을 만들어내고 <플레이보이>의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가족 텔레비젼 프로그램이나 공공 프로그램, 장년들을 위한 프로그램 방영을 어렵게 하는 것도 이 상업적인 요소이다.

음란 프로그램에 대하여 항의하는 행동도 실상은 이러한 시장성에 대한 저항이다. 음란 프로그램의 시장성 뒤에 숨은 것이 공산주의 음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떤 기업가도 이미 다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 전쟁을 끝낸 것은 평화주의자들의 시위가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드는 원가계산과 분석의 결과인 것이다. 중동전쟁을 반대한 미국의 한 강력한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의 자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석유에 기초한 미국의 경제를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처럼 착각의 베일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익보다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에 어리숙하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정직하다면 실제로는 우리가 상품 - 도덕에 의하여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장성이 있는 것을 소비하고 반대로 우리 소비의 능력에 따라 우리 자신이 시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먹는 것이 됩니다.” “더 많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 “당신의 차가 당신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디아들, 쓰레기 음식들, 뉴스들, 별로 필요없는 최신의 플라스틱 제품 혹은 다른 사람들을 소비시키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팔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 요구가 인위적으로 창조되고 나면 즉시 시장성이 있는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유일한 삶의 방식은 '소비'

우정, 친밀함, 사랑, 자부심, 행복 그리고 즐거움은 실제로 우리가 사고 소비하는 물체들이 되어 버렸다. 술이나 차보다 더 그런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들은 어떤 물건으로도 채워질 수 없으므로 물건의 소비는 절대로 충분해지는 법이 없다. 물건의 “더 많음” 혹은 “새롭게 변화된” 생산품들이 우리의 인간적 갈망에 대한 유일한 구제품들이다. 이처럼 판매자는 더 사치스럽게 고안된 약속들을 제시하며 더 큰 구매로 우리를 몰고 간다. 더 많은 상품들이 언론의 장난에 의하여 부추겨진 욕망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면서. 소비,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요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비는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소비는 일종의 중독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세계인구의 1/6이 전세계 에너지의 반과 총식량의 1/3을 소비시키기 위하여 무척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한 나라가 총인구보다 더 많은 라디오를 갖고, 가족이나 세대수보다 더 많은 텔레비젼, 아이들보다 더 많은 자동차들을 보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상품화의 가치체계가 극대화되어 사람들을 전적으로 지배할 적에, 소비는 필수적으로 삶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삶의 질에 관한 거룩한 표현들은 양적인 차원의 소비보다 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맥없이 쓰러져 버린다.

우리의 “구명정” 도덕가들은 익사해 가는 국가를 기꺼이 버릴 용의가 있으며, 우리 모두가 먹을 것이 충분치 않다는 “어려운 질문”에 당면해 있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인류의 구명정 한쪽 구석으로 밀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미의 악용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어있는 사실은 지니고 있는 물품들의 무게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갈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절대로 다시 채워질 수 없는 자연자원들을 소모해 버리는 기계산업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설적인 실재들이 우리의 의식을 가리우고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성에 대하여도 모순을 가지게 되었다. 상호성과 책임에 대하여 우리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며 우리 존재에 대하여 더 많은 요구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애완동물을 씻어주고 빗질해 주며 먹인다. 잔디를 단장하고 차의 먼지를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배려를 장애가 있는 노인들에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박해 버린다. 이 나이든 분들에게서 우리의 문화와 생명과 존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출처=pixabay.com​

가치의 기준은 텔레비전에서..

우리의 욕구, 가치관의 상품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의 상품화는 텔레비젼 산업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한 가정당 다섯대의 라디오와 총 8천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어도 우리의 상품화된 의식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텔레비젼 산업인 것이다.

미국인들이 일주간에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시간은 평균 26시간 정도인데 평균수명에 비추어 볼 때 이는 13년을 계속해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13년 중에 27%의 시간은 광고시간이므로 아마도 우리 생애의 3년간은 온통 광고만 보면서 지내는 셈이 된다. 그리고 광고는 자기존중을 끊임없이 하지 못하게 하며 수백만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를 새겨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 머리는 너무 길다, 당신 머리는 너무 짧다, 당신의 피부는 너무 희다 너무 검다, 당신의 냄새는 역겹다, 당신은 너무 뚱뚱하다 너무 말랐다, 등등」. 우리의 우유부단한 구매충동은 이와같은 파격적인 자기혐오 조장에 의하여 꿈틀거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자기혐오 조장작전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못미친다고 믿으면, 우리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채널을 선택하고 가치관들, 기호, 요구 등에 있어 아이들이 어떻게 조작되고 있으며 크리스마스 때에 최신유행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비참하게 느낀다고 어떻게 세뇌되어 가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학교 아이들이 집중적으로 계속 텔레비젼을 시청할 경우 말하는 능력을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서 퇴보하게 된다고 단정짓고 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텔레비젼을 많이 보는 아이들은 상호 인간관계에서도 더 공격적이 되며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보다 수동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신경증적이고 또한 지나친 행동을 많이하며, 살아가고 즐기는데 있어서도 별로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 가치관, 자기수용, 그리고 우리의 태도는 상품처럼, 상품과 같은 형태로 형성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유치원에 가기 전 아이들 대부분이 깨어있는 시간의 64%를 텔레비젼의 게임, 신파조 드라마, 쓰레기식품 회사가 제공하는 폭력적인 만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할 때에만 평화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계속 세뇌시키는 광고 프로그램들을 보며 지내고 있다 한다.

소유하는 것 만큼만 존재하는 인간

이와같은 소비선전과 이에 영향을 받아 우리가 맥없이 물건에 매몰되면, 전 세계가 그같이 소모되고 낭비되어 한 세대가 가기전에 모든 지구의 자원이 없어지리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이제 인구증가의 위기는 생존의 문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광고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는 소비자로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비하고 싶은 충동은 생존의 본능만큼이나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상품화의 문화가 우리의 존재와 목표를 단순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그것도 우리가 갖고 쟁취하는 것들을 잴 수 있을 때에 한해서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유하는 것 만큼만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 존재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유물에 의해 소유되며 우리가 만들어 내는 생산물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의 이미지와 모상에 따라 우리는 상품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상은 우리로부터 최대한의 값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우리의 인간성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15살된 “에이미들”은 그들의 상품화된 복음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이런저런 방식에 의하여 짧은 생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소비라는 동화, 경쟁 그리고 자신의 인격적인 삶을 시장에 내놓는 이 동화는 어린시절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원출처]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문화적 저항의 영성>,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1996년 3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