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당은 공동체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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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당은 공동체로 사는가?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03.2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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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말씀 읽기]
사도행전 2,42-47
로마 12, 4-18

[성찰]

지역교회는 방이나 집처럼 전체 가톨릭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다. 지역교회는 빵 한 조각과 같다. 빵 한 조각은 전체 빵덩어리가 아니지만 빵임에 틀림이 없다. 똑같은 사실이 어떤 특정한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어떤 특정한 교회는 전체교회가 아니지만 참다운 교회라고 말 할 수 있다.

교회생활의 작은 가정세포는 지역교회의 기본적인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앞으로 수년동안 교회의 힘은 원칙적으로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지역생활의 맥락속에서 교회를 형성하는 능력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초점]

마태오는 왜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해 말하는가 알고 싶었다. 본당신부 역시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마태오는 알고 싶었다. 공동체가 그렇게 중대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과거에 그것에 대해 듣지 못했고, 또 교회는 공동체없이 어떻게 그런대로 유지되어 왔단 말인가? 공동체에 대한 부르심이 오늘날 의미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일까?

본당들은 대체로 구원의 방법들, 기본적으로는 성사가 모든 가톨릭인들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주지시키려고 한다. 이런 교회는 모든 사람이 은총의 상태에서 죽으며 개인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구원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 사람들이 개인의 구원만 걱정할 때 공동체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런데 초기교회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교회와 구원의 방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초기교회에서 자주 쓰여지던 말은 “사귀다”로서 이 말은 두 개의 라틴어 낱말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함께 빵을 나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한데 모여서 자주 빵을 쪼개며 음식의 영양과 예수님에 관한 기억을 나누었다. “사귀다”란 말은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교회의 봉사직분의 핵심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들이 평화와 일치와 친교의 관계로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계들은 영원한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표징이다. 우리존재의 근원에 관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서로 연결된 관계라는 것을 상기해준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서 생명의 선물을 받으며, 형제들 자매들로서 살도록 우리 공동의 창조주로부터 불림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관계와 공동체를 지향한다. 사귀다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를 환대해야 하며 특히 나그네까지 포함시켜 환대해야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병든이, 감옥에 갇힌 이, 또 나그네와 일치시키셨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당신은 나를 맞아주었습니다”(마태 26:35). 나그네는 우리를 필요로 할지 모르나,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나그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나누어야 할 선물이 아니라 마치 우리자신의 것인양 고립과 분리속에 살고 있다. 사회는 점점 개인화되어 간다. 서두르는 사회속에서 바쁨은 이웃에 대해 시간내기를 어렵게 만든다. 부서지고 부분화되어 가는 문화속에서 뉴우스매체는 나그네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부채질하며 두겹세겹으로 문단속하도록 우리에게 다짐한다. 큰 기관들은 공동체의식보다 고립감을 더 두텁게 해간다. 구약의 개념에 의하면, 이 고립은 죄를 이해하는 잣대가 되었다. 예수에게 있어 근본적인 죄는 사랑하지 못하고 관계속에 살지 못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하려면 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십계명을 지켜도 여전히 “죄악의 상태”에서 살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과의 일치에 문을 닫고 있다면 그는 “죄악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죄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죄악의 상태에 사는 것” 그 반대는 “공동체안에 사는 것”이다.

공동체에 관한 새로운 강조는 또한 혜택받지 못한 이들과 그밖의 정의문제에 새로운 관심을 두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우리가 좋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면, 경쟁적이며 고립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공동체와 친교의 가치관을 선택해야 한다. 그때에 비로서 우리는 죄의 상태에서 살기를 중지할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의 부르심과 사명에 의하여 교회는 고립과 경쟁, 탐욕과 불의에 저항하는 목소리이며, 평화와 화해의 구원이 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어울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공동체는 언제나 심각한 씨름들을 하고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서로의 차잇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판단적이며,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 힘을 겨룬다. 개인의 구원을 가장 긴급하게 쫓아가는 폐쇄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공동체에 관한 꿈과 이상을 살아있는 가능성으로 말하고 있다. 일치란 오로지 자신을 주고 부서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친 교

사람들은 자주 공동체에 관하여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는다. 오늘날 강조되는 것은 친교적인 공동체이다. 고립화되어가는 대형사회에 대한 해독제로서 친교는 잡히지 않는 종점이다. 흔히 친교와 따뜻함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불일치를 드러내어 해결하려하지 않고 쉽사리 감추어 버린다.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비슷한 사람들을 찾으며 나그네를 환영하지 못하거나 나그네들이 우리들안에 침투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

친교는 자주 이상한 이념에 의해서나 모든 것들이 그 주변에서 흡수되는 강한 가부장적인물의 출현에 의하여 달성되기도 한다. 친교가 깨어질 때 사람들은 깊은 차원의 나눔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들이 기대했던 응답이 아닌 다른 응답을 체험함으로서 배신감을 느끼고 공동체에 관한 꿈을 포기하게 된다.

신약은 공동체생활에 관하여 강하게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자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자” 그러나 우리가 갈등없는 친교를 기대하면 공동체는 쉽게 서로를 터놓지 않게 된다.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흔 살 된 사람과 열네살된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또 형제자매들이 항상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서 갈등과 모순들은 우리가 자신과 이웃에 대한 착각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그리하여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인정하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 있어 중요한 자질은 다양함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려는 공동의 결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 핵심이다.

친교는 또한 구성원들의 홀로있음을 지지하는 공동체를 요구한다. 공동체는 무지막지한 요구로서 우리를 지치게 만들 수도 있다. 지속되는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중심으로 지나치게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체밖에서 고독을 찾다보면 쉽사리 하느님과의 홀로있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착각과 외로움속에 빠지게 된다. 진정한 홀로있음은 우리의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며 한편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인 힘을 배양시킨다.

공동체구성원들은 기도와 예배를 위하여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차이점들의 풍요로움을 나누고 하느님의 뜻에 관한 다양한 이해들을 조화시킬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들에게 의도하시는 하나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전체로서 이 그리스도의 지체는 혼자 힘으로는 부족한 분별의 힘을 가지게 된다. 노동자로서, 가족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우리는 공동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 얼떨떨한 세상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결정과 행동에 공동체로부터 격려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개인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는 다양하지만 모든 은사는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봉사직분과 지도자직분이 선물로서 주어졌다.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정의, 성 문제등에 관한 신앙적 관점을 나누기도 한다. 공동체의 관계들은 상호사랑과 존경, 그리고 권위보다는 올바른 감사와 인정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진가를 발견하고 세상속에서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도록 불리웠음을 알게 된다. 관찰자로부터 참여자로 변해가며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일치감은 더욱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되어가는 것에 대한 체험은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공동체는 거대한 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세워지는 경향도 있다. 어떤 공동체는 제도화되는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 어떤 그룹들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나 인권옹호등의 주제를 갖고 형성된다. 혹은 같은 구역에 살거나 같은 본당에 나가는 이웃사촌이기 때문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떠한 공동체이든간에 성장하고 생명을 주는 공동체가 되려면 세가지 기본적인 요구가 채워져야 한다. 첫번째로, 공동체 구성원들은 한데 모여 신앙을 나누어야 한다. 권위를 따르고 배우기보다 권위에 대한 체험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양심을 다스려야 한다. 성찬례는 공동체의 기도생활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두번째로, 공동체는 상호지지와 교육을 위하여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공동체는 될 수 있는 대로 작아서 구성원들이 서로를 잘 알고 친교와 소속감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들은 평등하게 만나고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를 아껴야 한다. 지도력은 공동체에서 싹이 트는 것이다.

세번째로,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행동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공동체는 복음적가치관을 일상생활 속에 반영하는 생활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성서는 행동에 빛을 주고 의미를 준다. 행동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일치하고, 홀로있음의 필요를 인정하며, 참여와 책임감이 있는 공동체 그리고 참여에의 결단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구성원들이 위에서 아래를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을 내릴 적에 가능해진다. 또한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가 될 때에 봉사직분도 더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나눔과 성찰]

1. 나는 현재 어떤 그룹이나 공동체에 속해 있나?
2. 나의 일과 가정생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 공동체로부터 격려받는 체험이 있는가?
3. 나는 공동체가 친교, 혹은 갈등과 긴장을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간다고 생각하나?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고립과 개인주의 그리고 비인격적인 기관들의 세계속에서 내가 원하는 공동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나는 본당에서 이러한 친교와 지지, 참여의 소공동체들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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