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문화 : 아메리카 문화의 긍정적인 측면
아메리카 사회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은총을 받은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좋고 자유로운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 경험해 보는 꿈을 이루어내고 있다. 우리에겐 훌륭한 땅이 있고 또 엄청난 기술의 진보를 이룩하였다. 우리 백성들은 인종차별, 가난, 타국가들의 요구와 고도로 제도화된 정부의 거짓에 대하여 평등하게 대처하려고 엄청난 내적인 대립을 잘 극복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평등, 공평함을 향한 민주적인 갈망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며, 우리의 음흉한 충동을 검진하고 있다. 우리는 재벌의 지배와 광고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자유로운 언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노력과 법률의 제정으로 거의 전면적으로 문맹을 퇴치하였고, 보건, 식량, 은퇴후 보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들은 자기존중, 정치권력 쟁취 그리고 안전한 사회보장 등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축복받은” 성과들이, 이러한 선물들 자체를 소멸시킬 위기에 처해있다. 미국사회(그리고 그리스도교까지 포함하여 미국문화와 일치되는 종교적인 신앙까지)는 엄청난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인간의 투신, 인간의 이익에 기여하는 참다운 인간의 생산성이, 가정공동체와 시민정신이, 정의감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 생명과 사랑의 가치관이 모두 심각하게 전면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문화 : 수치스러운 아메리카 문화
미국사회는 다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성찰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나라와 다른 시대에 자주 나타나는 악을 들먹거리며 우리를 목조르고 있는 악을 어느정도 용서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진실에 충실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나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실패나 레닌혁명 이후 러시아의 실패, 현대의 독재정치 등은 우리의 삶에서 지금 되풀이되고 있는 그들의 흔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보다, 우리를 경고하기 위해 인용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고 그 무엇보다 가족을 가장 선호한다고 하여 그 가족에 도전하지 않거나 변화를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나 대상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는 더욱 더 행동이 필요한 법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애국주의가 아니라 미련한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철저하게 서로 분리된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뉴욕의 보험회사들이 임신을 말살시키는 데에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면서 아이를 출산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임산부들이, 분만상담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모르는 채 낙태의뢰창구로 안내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당국은 본인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젊은 흑인여성들의 불임수술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의 식량문제가 부의 공평한 분배보다 오로지 피임약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표하는 나라에 이미 살고 있다. 우리는 성병 감옥수들과 낙태시킨 태아들에게 의학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안락사가 주 법률로 제정되며 최고법정이 태아라는 인간생명의 문제를 재산과 개인문제로 축소시켜 낙태를 제도화시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주정부의 권한에 따른 사형집행, 핵무기의 확산, 임신말살, 안락사 등의 문제가 원가계산과 분석에 따라 중재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는 전 인류의 25%가 먹는 것보다 더 좋은 음식을 개에게 먹이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운 나쁘게 비대해진 개들의 다이어트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시장조사에 의하여 밝혀졌다. 우리는 비대증으로 얻어진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더 많은 식품을 생산해내고 소비하고 있다. 어떤 나라들은 영양실조를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데 말이다.
우리는 지난 20여년간 육류소비가 배로 늘어났으며 따라서 과다영양섭취로 인한 죽음이 증가하고 있다. 한편으론 “구명정(救命艇)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공해를 유발하는 풍요로움으로 인해 계속 질식당하고 있다.
우리는 남몰래 비합법적인 전쟁을 자행하고 있는 나라에 이미 살고 있다. 이 비밀전쟁은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참혹한 폭력과 폭격의 침투를 가능하게 했으며, 제 3세계의 국민들을 경멸하는 것 이외에 하는 일이 없는 지도자들을 추켜세우고 조작하고 지배하며 다른 국가들의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사회, 경제, 정치분야에서 우리가 즐겨 쓰고 있는 가장 최근의 단어는 “완강함”이다. 어떤 보수적 언론인은 그의 인간적인 감수성으로 꽤 유명한 인물인데, 지금 국가차원의 살인을 인정하고 있다. 눈하나 꿈쩍 하지 않고 그는 우리의 경제체제가 시새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극찬한다. 여론조사는 우리의 새로운 완강함이 인간생명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 중의 3분의 2가 무력팽창을 원하며 63%가 낙태를 68%가 사형제도를 원하고 있다. 방어에 관한 우리의 완강함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된다. 그리고 이 가난한 사람들은 제 3세계의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마을에도 살고 있다. 1982년 레이건 정부가 군부예산으로 2220억불을 신청했을 때(국방성 역사상 평화시에 가장 큰 예산이었음), 1981년의 식량보조예산이 국방성을 단지 33분간 움직일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던 것을 비교해 보면 그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을 뿐이다. 또한 1946년부터 1978년까지 32년간 미국이 국제연합에 지원한 금액은 국방성의 19일치 예산에 불과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일년에 약 500억 달러의 돈을 가짜요구와 가짜약속의 창조를 위하여 사치산업에 퍼붓고 있다. 광고의 세계, 우리 경제의 “혈맥”인 광고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물건을 가지지 못하면 비열하고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해 왔다. “이 자동차가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코카콜라는 진짜입니다”, “사랑은 냄새입니다” 등등으로.
이것이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어 왔던, 우리가 숨쉬어 왔던 문화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들었던 “이것이 진짜 세계입니다, 신부님”. “권력이 말하고 돈이 말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며 그런 문화의 복음서인 것이다. 이런 문화와 복음은 바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원출처]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문화적 저항의 영성>,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1996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