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거룩하게 변화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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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거룩하게 변화 되었는가?
  • 이기우 신부
  • 승인 2019.03.18 0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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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2019.3.17] 창세 15,5-12.17-18; 필리 3,17-4,1; 루카 9,28ㄴ-36/예수의 거룩한 변화, 제자들의 몰이해

[이기우 신부 강론] 

1.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려고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오늘 첫째 독서인 창세기에서 들으신 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의지를 인류 역사상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드러내신 이래,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번번이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내용이었지요. 실상 세상은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모자라서 쾌락과 재물을 추구함으로써 쾌락과 재물을 우상으로 떠받드는가 하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기 집단 심지어 자기 나라나 민족을 아끼는 나머지 다른 이들과 다른 나라와 민족을 업신여기는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경향이 현세가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현세가 죄악으로 가득 찰수록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으로 은총도 가득히 내리셨습니다. 그 은총의 징표가 구세주 강생이요 교회의 출현과 활동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려는 하느님 계획이 예수님의 일생에 집약되어 있고, 그래서 인류에게 거룩한 변화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삶이 오늘 세 제자 앞에서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사건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거룩한 변모

2. 이제 거룩한 변모 사건이 공생활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활동입니다. 이를 케리그마라 합니다. 이 케리그마의 과정에서 많은 치유와 구마의 기적들이 나타났고 이를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기적을 체험한 군중 가운데에서 열두 제자도 뽑으셨고 이 제자들은 집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만 자기 집에 머무르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토박이 지지자들도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이 토박이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은 군중 안에서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그분을 시기하고 모함했으며 종내에 가서는 그분을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많은 군중이 기적이 일어나는 데 대해 경탄도 하고 혜택과 도움을 받으려고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몰려들기는 했지만 정작 하느님 나라에로 회개하기를 미루고 있는 가운데, 적대자들의 음모가 노골적으로 드러날 무렵부터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에서 뽑으신 열두 제자를 당신의 뒤를 이어 복음을 선포할 사도들로 양성하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이를 디다케라 합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도 들었고 기적 사건들도 목격했으며 비유에 대한 해설까지 따로 듣기도 했으면서도 좀처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몰이해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타볼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얼굴이 빛나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을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활약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알아듣기가 황당해서 꾸며낸 신화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은 신앙으로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써는 시대적으로 앞서서 활약했던 두 인물, 즉 히브리 노예들을 하느님의 명에 따라 해방시키고 율법을 제정하여 하느님 백성으로 성숙시킨 지도자 모세나 남북으로 왕국이 분열된 후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4백 명이 넘는 바알 신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이겼던 예언자 엘리야를 불러내는 일쯤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3차원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존재하시고 활약하신 분이시니 그렇습니다. 모세는 구약 율법의 제정자로서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예언자이니, 그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활과 임무가 율법의 완성이고 예언의 성취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4. 하지만 눈 앞에서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을 목격하고도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워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한 말이,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였습니다.

세 제자에게 그 거룩한 장면을 미리 보여준 뜻은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므로 그 장면의 상황이 지속될 수도 없는데 산 위에서 초막까지 지어서 아예 눌러앉아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맞지 않거니와, 더구나 그 초막을 어부 출신이 베드로가 지어드리겠다는 말도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정작 초막을 지을 줄 아는 분은 목수 출신이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어드리겠다는 건지 지어내라는 건지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어서 기가 막히셨던지 예수님께서는 아무말도 못하시고 계시는 가운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소리는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들려온 것으로서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홀로 들으셨는데, 이제는 제자 세 사람에게까지 들려온 것이 다릅니다.

거룩한 변모가 뜻하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되어 세상이 거룩하게 변화하는 데 있어서는 예수님의 역할이 중요하고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가능하다는 이치가 세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한 변모의 기적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시려는 예수님과, 이를 목격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특징입니다.

6. 사도 바오로도 필리피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듯이, 거룩하게 변화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도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일어난 거룩한 변화를 교회에서도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의 성사적 변화로써 예수님의 삶에서 이룩된 거룩한 변화를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변화로 나타나게 합니다.

신앙으로써만 타볼 산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이해할 수 있듯이, 신앙으로써만 십자가 수난으로 이어진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으로 나타나신 부활로 거룩하게 변화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으로써만 겁이 많고 믿음도 약했던 제자들이 용감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로 거룩하게 변화된 교회의 시작을 이해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신앙으로써만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가 다양한 역사적 변천 속에서도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이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에 바탕하여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이 원하는 교회의 거룩한 변화 중에 으뜸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따라 살고, 그분의 현존하심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처신하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조차도 교회가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기를 원하지 세상의 죄악을 닮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은 세상의 죄 많은 역사 안에서도 은총으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성취하신 건전한 진보를 교회 구조로나 교회 사상으로도 수용하기를 원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제도와 민주주의는 맞지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교회 안에 남아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역사를 이끄시는 성령께 순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상인 신학은 교회의 역사와 현재의 구조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역사와 현재 구조를 복음을 기준으로 쇄신할 수 있도록 비판적으로 기능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거룩한 변화가 촉진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이 저질렀던 죄상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룩한 문명보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그 문명을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어야 복음선포의 자격이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도 완벽하지는 못하고 결함은 있지만 그래도 역사상 상대적으로 가장 나은 제도이니만큼, 세상은 세상이 이룩한 민주주의보다 더 인격적이고 공동선에 적합한 복음적 민주주의로 교회의 구조가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사상과 활동 역시 세상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선도하는 향도가 되기를 세상은 원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보다 뒤처진 모습으로 남아있는 교회의 구조나 사상을 우리는 아직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마치 타볼 산에서 그 엄청난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베드로처럼 세상이 이룩하는 놀라운 기술적이고 제도적으로 나타나는 외형적 변화에 놀라서 그 안에 담겨있는 거룩함의 요청을 알아보지 못하는 격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면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는커녕 역사의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를 전례적으로 선포하면서 자신의 거룩한 변화를 다짐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의 거룩한 변화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을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과 달리 오늘날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시행착오를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아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선도해 낼 수 있을 만큼 거룩하게 변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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