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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망산 가는 노래 "천상도 지상이고 지상도 천상임을 너도알고 나도알고"[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16]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오늘의 성서] 요한 묵시록 13, 1 - 19

짐승은 죽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13장에서는 붉은 용, 악마의 대리인으로 '짐승'이 등장한다. 이들 역시 붉은 용처럼 불완전한 권력을 뜻하는 열 개의 표범을 닮았고, 곰의 발이나 사자의 입처럼 생겼다(묵시 13,2). 곧 짐승들이 한결같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듯싶다. 도덕성이나 여인의 따뜻함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근육질의 힘'만이 재산인 존재였다.

이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힘을 받았으며,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누렸는데(13,7),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짐승을 따라간 이유는, 그 짐승이 치명상을 입고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13,3) 세상 사람들은 "이 짐승처럼 힘센 자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 짐승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하고 외치면서, 그 짐승에게 이런 능력을 준 '용'을 경배하였다(13,4).

죽음은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구원을 '영생' 이라고 하지 않는가. 죽지않고 영원히 살 욕심으로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그래서 '영생'을 약속하지 않는 신흥종교는 없는 모양이다.

둘째 짐승은 '기적'으르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였다(13,14). 병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치유 은사'를 내린다는 수많은 신흥종교들은 이 모범을 따라서 오늘날도 치유를 베풀며 미욱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다. 예수님이 아직도 기적을 바란다고 책망하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백성들을 나무랄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제 잇속을 챙기고 권세를 누리려는 사이비 종교인들의 파렴치함 또한 역겨운 노릇이다.

둘째 짐승은 이제 칼을 맞고도 죽지 않았던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 마저 세운다. 속임수로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우상이 말을 하게 만들고, 그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인다(13,15). 그리고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낙인을 받게 하였다(13,16).

여기서 오른손은 우리의 모든 활동을 뜻하며, 이마란 곧 생각이다. 그러므로 둘째 짐승이 한 짓은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다하여 우상을 섬기는 노예로 사람들을 낙인찍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 노예가 되어 너무나 당연히 있을 법한 생로병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에 사로잡힘으로써 사람들은 죄의 노예가 된다.

죽음이라는 협박으로 주눅든 인간들 사이엔 이제 우상의 질서가 자리잡고, 이 질서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생존이 위협받는다.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13,17) 백성들을 어떤 어두운 힘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통제하며, 그 힘 앞에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이런 노예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알아서 행동하는 법을 잃어 버린다. 기계인간(사이버그)처럼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일 운명이다. 자주성 창조성이 전연 없이 오로지 힘있는 자의 명령에만 복종해야 하는 세계란 얼마나 끔찍한가. 돈과 권력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는 사회란 얼마나 인간을 망가뜨리는가.

그 짐승이 가리키는 숫자 '육백육십육(666)' 은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인데(13,18), 히브리어 문자의 숫자적 가치에 따라 풀이하면 '카이사르 네로'이다. 요한 묵시록이 쓰여질 당시에 가장 잔인했던 로마 황제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였는데, 그는 네로 황제가 부활한 것 같은 인상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또한 666이란 7에 미치지 못하고 12의 절반인 '불완전한 상태' 를 뜻한다. 이는 곧 절대적 권력의 상대성과 약함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핑크빛처럼 보이지만 덧없고 불완전한 절대권력의 약속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짓은 피해야 하며,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삶을 노예살이로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고개 너머 있는 북망산

죽음을 삶과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길 때 공포가 생겨난다. 이 공포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인데,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삶과 잇대어 있는 친숙한 것으로 만드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장례 예식은 한 인간이 죽음을 통하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미있게 넘어가도록 돕는 섬세한 장치였다.

여기서는 늘 '향두가' 가 불려졌는데, 이는 곧 장송가요 만가였다. 요즘이야 장례식을 치를 때 영구차로 시신을 운반하기 때문에 향두가를 부르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직도 시골에서는 습속에 따라서 시신을 상여에 싣고,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애끊는 음조로 향두가를 부르며 묘지로 가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전통은 예로부터 있었느데, 고구려의 장례 의식 가무에 대하여 "장례 때는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서 고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긴 잠으로 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 내세로 여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원래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이 사랑으로 공경하고 추모하는 한편 , 공포와 거리끼는 감정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여 떠나는 영혼을 위안하고 그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어허 넘차너허. 북망산이 멀다마소. 건너산이 북망일세. 어허너하너하. 이세상에 나온사람 장생불사 못하여서 이길 한번 당하지만 어하넘차 너하. 우리마을 곽씨부인 칠십향수 못하고서 오늘이길 웬일인가. 어하 넘차너하. 새벽닭이 재쳐우니 고벽숲이 풍슬슬분다. 어하너하너하"(신재효 본「심청전」)

죽어서 간다는 북망산이 바로 고개 너머에 있다 하니,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죽음은 가깝게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향두가 중에는 북망산천 멀다더니 가는 길이 북망이요,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밖이 저승일세." 라는 대목도 있다.

인연으로 맺어진 이승과 저승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더라도 영혼이 남아 항상 후손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돌보아 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만일 자손들이 조상의 혼령에게 예절과 도리를 제대로 다하지 못하면 노여움을 사기도 한다고 믿었기에 정성껏 죽은 자의 장례를 치렀다.

한편 메김노래인 향두가는 생을 마치고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고인에 대한 애달픈 감정을 슬픈 가락과 사연을 풀어내면서 다독거리는 동시에 죽음의 길을 흥겹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슬픈 분위기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준다. 그렇게 저승으로 가는 이들에게 이별인사를 드리고, 산 자에게 죽음의 뜻을 담백하게 그려주고 있다. 

"어허어허 어허리넘차 어허.
어화 우리 벗님네들 보기좋게 발맞추고
듣기좋게 받어주소.
오늘떠나 가시는분 잊 가면 영별일세.
친척들은 물론이요 제반동지 슬퍼한다.
애도가와 만장시로 존령에게 명복빈다.
어화우리 벗님네들 잘모시고 작별하세.
공수래 공수거를 옛문자로 알았더니 과연허언 아니로다.
지나간일 생각하면 일장춘몽 부운같다.
오늘가는 이세상을 다시올수 또있을까.
상전이 벽해되고 벽해가 상전되어
천백년이 지나가도 시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가는것도은 나홀로뿐 아니로다.
전일에도 조상님네 다이렇게 가시었고
앞날에 후생들도 이와같이 갈것이다.
가는사람 갈지라도 오는사람 또있으니
천지가 있는동안 인생도 있으리라.
천지간 영원토록 조화주는 누구신가.
조화주 하느님은 생생화화 기르신다.
만물에서 기한주어 오고가게 하였으니
뉘라서 이 하늘법 막을자가 뉘있으리.
하늘법에 순응하여 때가오면 갈뿐이다.
만물들을 내실적에 초목금수 어별들은 생혼각혼 주었으며
사람들은 사랑하사 삼혼을 주었으니
생혼 각혼 영혼이라
영혼이 있으므로 만물을 다스리고 하느님도 알게했다.
하느님은 신이시니 신을따라 가는 사람
안심하고 갈것이다."
(1962년 8월10일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 성창섭,79세 종교사업)

 

사진출처=pixabay.com

죽음.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

죽음이란 슬플 수는 있어도, 맞이하는 자의 태도에 따라서 고통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이 되기도 한다. 죽음이란 생각하기에 따라서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여행이며 옮겨감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문이며, 향두가란 이 문을 드나들 때마다 환송하고, 환영하는 축가인지도 모른다.

낮이 밤이 되듯이 밤이 지나면 새벽이 동터 온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로 접어든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교의 선사들이나 인디언들은 스스로 죽을 때가 온 것을 느끼면 음식을 마다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제 죽음을 또렷하게 의식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였다. 이 처럼 죽음과 조화를 이루는 것만큼 성숙한 인격은 없다. 죽음이란 단지 꽝 소리를 내며 닫히는 호들갑스런 문이 아니라 새롭게 열리는 세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노래했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숨졌다고 하나, 이 말은 죽음에 임박한 유다인들이 입버릇처럼 외던 말이었다고한다.

한편 루카복음에서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하고 돌아가셨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는 말을 남기셨다. 생전의 예수님의 행동거지로 볼 때, 죽음을 달게 받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 예루살렘이라는 사지로 들어가심으로써 이미 죽음을 감당키로 하셨던 예수님이기에, 우리는 그 의연함에서 죽음 이후의 열린 미래를 읽을 수 있다. 그 미래를 맞이하는 자의 마음속에 이미 천국도 지옥도 있는 것이다.

[마무리 묵상]

어하넘차 어하넘차.
요령소리 슬프다고
울지않게 도우소서
이승에서 저승까지
어찌보면 가까운데
요령부득 마음열어
담담하게 맞게시리
당신께서 도우시면
천상도 지상이고
지상도 천상임을
너도알고 나도알고
우리모두 알게시리.
사는동안 복쌓으면
죽어서도 복되리라.
죽어서 복된몸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하는 우리인생
그얼마나 좋으실까
그리그리 생각하면
얼마나 좋으실까,
하느님 우리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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