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혁명가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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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혁명가가 되기 위하여
  •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
  • 승인 2019.02.27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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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1

[이번 주부터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의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문화적 저항의 영성>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나는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 따르기>를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룹을 위하여 썼다. 이 두 그룹에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정의나 혹은 신앙생활에 전적으로 온 존재를 다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신앙이나 정의에 투신하고 있지만 그 신앙이나 정의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느낀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을 마련하였다.

나는 심오한 신앙의 지지를 받기를 원하는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자신들이 지닌 정통신앙에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모이게 하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 신심깊은 사람들과 행동파들은 전체가 되기 위하여 서로를 필요로 한다. 아니 그들 자신으로 완성되기 위하여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당신은 남자와 여자가 소모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인간주의자일 수 있다. 당신은 본당 신부로서 신자들에게 추악한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상황을 알리고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고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독신이나 결혼한 사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살거나, 정치단체, 학교에서 일하며 희망이 다 사라질 때에도 투신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이 속한 교회가 당신에게 가르쳐 준 복음적 가치관을 실천하면서 그 교회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문화를 초월하는 신앙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를 초월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우리가 초대받은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발견되며 그리스도교 교회의 깊은 전통 속에 이어지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기도, 성사, 투신, 공동체 생활에서 참으로 혁명적인 정치,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당신은 이 사회에서 당신 홀로 결혼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는 부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 가슴속에 어떤 세속적인 복음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미 신앙이 없다는 사실에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성사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의심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싶지만 당신의 생활전선에서 그분의 현존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신앙이 초대하고 있는 문화가 제도적인 낙태, 붕괴된 가족생활, 퇴폐의 문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세계의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법을 찾고 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이런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신앙은 정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우리의 사회적 관계, 개인적 삶 안에서 표현되며 성숙해가는 것이라고.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은 정치 경제 문제들이며 동시에 도덕, 종교적인 문제들이다. 당신을 괴롭히는 군비, 사형집행, 인종차별 등의 문제들은 종교적 영적인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인 문제들이다. 비록 정의가 모두 신앙과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참으로 살게 될 때 당신은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다운 정의를 실천할 때 당신은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보수주의

“새로운 보수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이 새로운 보수주의는 자주 도덕성과 신앙의 문제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가장 풍부하고 심오한 부분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실용주의일 뿐이다. 이것은 권력과 특권을, 특히 경제적, 군사적, 이념적인 특권을 합법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올바른 질서에 관한 모든 제안을 억압한다. 이것은 자기이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일 뿐이다.

이 새로운 보수주의는 위험스러운 성향들의 결과이다. 즉 정의의 실천으로부터 (적극적인 사랑과 봉사) 신앙을 분리시키는 성향과, 신앙을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사회 정치 국가적인 권력과 동일시하는 성향의 결과물인 것이다.

첫번째 성향의 위험은, 사회와 문화가 밀접하게 영성과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적 갈망이 지닌 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요구로부터 분리될 때에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 기존의 세속세계와 종교세계는 이 쇠약한 분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 그 분리는 국가로부터 교회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회적 실재로부터 신앙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우상과 신앙의 동일화 현상

사회적 실재로부터 신앙이 떨어져 나가면 종교적인 추진력(갈망)을 어떤 정치적 경제적 권력적응과 동일시해 버리게 된다. 이렇게 하면 두 번째의 위험한 성향이 나타난다. 문화적 기준, 문화적 우상과 신앙의 동일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정치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메리카문화와 자본주의로 축소시켜버렸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도덕성”과 “다수”라는 이름 아래 그리스도교를 확산되는 무장화, 경제적 성공, 범죄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응징과 끊임없이 연결시킨다.

그들은 예수 자신의 메시지와 삶의 불길, 연민을 거의 다 소화시켜 버릴 지경에 와 있다. 매주일마다 언론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말하지만 항상 돈과 성공에 대해 떠들고 가끔은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인기, 자본주의의 영광과 사회주의의 위험을 말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무시되는 사람들,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실패하고 감옥에 갇히고 버려진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문화적 강요에 의하여 협박당하고 소모된 초라한 신앙의 모습이다.

이같이 초토화되고 길들여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파악은 이 책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살아있는 신앙과 적극적인 행동가의 사랑 사이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많은 남녀가 얼마나 쉽게 국가적, 경제적 문화적 우상앞에서 굴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한다.

혁명적 행동주의와 거룩한 신앙

나는 행동가들이 신앙에 더 깊이 뿌리를 두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의 삶과 행동 안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생활 안에.

나는 예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더 진한 행동가가 되기를 바라며 그들의 신앙이 변용된 것에 대해서도 더 비판적으로 파악하게 되기를 바란다.

비효과적으로 정의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문제에 답변하면서, 나는 더 많은 내면성이나 더 많은 행동주의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면성과 행동 모두의 통합을 말하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참으로 혁명적인 행동주의와 온전히 거룩한 신앙을 함께 가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거룩한 혁명가가 되라는 뜻이다.

문화에 의해 잠식당하는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의 삶과 그분의 구원행위, 그분의 제자들과 전통이 문화적 우상들에 대항하여 행동한 것을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국가주의적 신화, 무력의 힘, 경제적 우월성이라는 환각으로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결단을 분리시키기로 기꺼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생활을 고수할만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이나 충분히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정의와 영성이 통합되고 있는 표징도 교회에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만일 전통적인 가톨릭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대한 비판과 맑스에 대한 언급 때문에 추방된다면, 적어도 그들은 정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더 깊은 신앙으로 초대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사회운동가들이 죄많은 교회의 약속파기와 변덕스러움으로 실망하여 성사와 기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면,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과 대면하고 있는 강요된 현실에 대하여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통하여 살고 죽을 수 있는 항구한 어떤 희망이나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대가를 요구하며, 또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의 길은 자유의 길

이 글의 첫 번째 부분은 “상품화”라는 지배적인 개념 아래 있는 아메리카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물건으로 인식할 때, 소모품의 이미지 아래 살고 행동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폭력, 두려움, 조작 그리고 격리의 생활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비판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악의 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위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상화에 있다. 그리고 이 우상화는 체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인식하기, 가치관 가지기, 살아가기 등의 “인격화”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를 통하여 나타난 그 내용을 말하고 있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며 성사생활, 기도, 투신,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행동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자유의 길이다. 그 길은 또한 체계적이며 전체적인 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하여 그분이 요청하시는 것은 전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문화와 충돌하는 것이다.

이 책은 대부분이 해석적인 글이다. 즉 우리 문화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종교의 의미, 자주 논란의 대상은 되었지만 드물게 실천되는 종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어떤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도덕에 관한 책이 아니므로 여러가지 현실문제, 전쟁, 낙태, 무장화, 쾌락주의 등에 관한 내 개인의 의견에 대하여 그것을 지지할만한 논쟁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내 목적은 어떤 특정한 도덕적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입장들간의 관계,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형과 낙태공장의 비인간성을 증명하기 보다 그것들의 연관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쾌락주의와 결혼생활의 분해 그리고 자유시장경제가 얼마나 사악한가를 밝히는 것보다 그것들의 상호 결탁관계에 대하여 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접근도 어떤 교의적인 논쟁에 의하여 정당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투신하도록 초청하는 매우 단순한 호소이며 확신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사회적 정치적 공생주의자로서, 그리고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글을 썼으며 나의 마지막 신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원출처]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문화적 저항의 영성>,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199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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