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을 위한 신자 생활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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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을 위한 신자 생활은 어떻게?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02.2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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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의 평신도 -1

[본 자료는 1992년 10월(8호)부터 1993년 3월(13호)까지 <참사람되어>에 실렸던 것을 1996년 <참사람되어> 11월호에 한데 모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을 거룩하게 사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편집자]

[성서 말씀 읽기] 

요한 1서 3,11-18 서로 사랑하라
베드로 1서 4, 8-11 은총의 선물을 잘 관리하는자

[성 찰]

요한 바오로 2세 :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사진출처=pixabay.com

[초점]

많은 사람들은 사회생활(공공생활)에 얼마나 참여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사회활동보다는 본당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공공생활에 참여하도록 하느님의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주일미사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교회가 되도록 불리웠다. 교회의 일은 정의, 사랑 그리고 평화의 하느님왕국을 여기에 이 지상에 세우는 것이다. 평신도는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그들의 성소를 사는 것이다.

인권운동, 살기좋은 이웃 만들기, 환경보호 운동, 핵무기 반대운동 등 보다 나은 사회를 조성하기 위한 여러가지 투신들은 커져가는 개인주의와 정부의 부패, 핵무기의 위협, 범죄증가 그리고 경제상황의 악화 앞에서 무력하게 느끼는 감정 등으로 방해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의지와 맛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존의 기구들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결정에 영향을 주려고 힘을 모으고 있다.

신앙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들이 만드는 여러가지 자발적인 시민단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신자들은 개인의 구원에만 열중하고 종교와 공공생활이 접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그러나 요한바오로 2세 교종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가장 훌룡한 시민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세기에 와서 많은 교종들과 주교들의 가르침은 교회가 보다 더 깊숙히 세상변화와 섬김에 투신하도록 용기를 복돋우고 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투신이 개개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거룩함이란 사회적인 차원을 지닌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자신이 사회사도직에 참여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이 이미 설립된 시민단체에 참여하도록 돕기보다 자체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들이 세상속에서 교회사명의 첨단에 있다고 예견하였다. 우리는 시민공동체나 정치공동체에의 참여가 어떻게 교회의 전반적인 사회사도직에서 결정적인 부분이 되는지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교회자신의 요구와 프로그램이 부각된 사회문제들에 응답해왔다. 낙태반대운동 같은 것은 높은 지지를 받는 반면 여성 인권운동, 노동자 인권운동 등은 그렇지 못하다. 복잡한 사회구조 때문에 문제들이 복잡해지고 따라서 교회구성원들은 무엇이 공동선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고 또 합의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항상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사회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긴급한 문제는 평신자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이 과제에 있어 한가지 장애물은 공공생활과 사적 생활간에 우리가 줄 그어 놓은 날카로운 구분이다. 오늘날은 공적인 책임보다. 개인주의가 더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이 너무 광란적이고 조각나 있어 세상과의 연결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부족하다. 또 개인적인 풍요에 대한 갈증은 잘못된 것이며 자주 허무로 끝나고 만다. 우리에겐 개인적인 욕구에 관한 즉흥적인 추구보다 결속이 부족하므로 우리를 함께 묶어줄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묶어주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병들고 나이든 사람들을 돌보는 강력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이익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의 정 때문에 공공생활에 참여한다. 또 사회운동기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지역의 이익과 관련된 일들에 참여토록 하며, 환경문제처럼 미리 준비해야 할 문제에 관하여도 책임의식을 가지도록 종용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법을 지키고 어떤 때 공동체의 사람이나 어떤 것이 위협을 받을때 함께 있으면 좋은 시민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생활과 공공생활은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 다른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발전하지 못한다. 공공생활은 하나됨과, 당장의 이익이 없어도 공동선을 위해 서로 관심을 갖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공간을 같이 쓰고 자원을 같이 나누고 있으며 공동의 기회를 갖고 있으므로 함께 사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서로가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나그네들

공공생활은 하고 싶다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삶의 한 마당이다. 우리는 나그네들을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그들에게 친철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이들, 죄수들, 가장 고통받는 이들, 우리사회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당신을 하나로 여기셨다. 나그네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요한 3,17).

우리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기로 선택한 첫번째 개인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속에서 바로 개인성이 나타나는 상호의존적인 사회적 존재들이다.

종교와 정치가 섞일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 조차 그리스도인들은 공공생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왕국”은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시민생활을 하고 정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왕국”과 “공공생활”은 모두 인간적 일치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이나 특혜 혹은 선택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사회라는 인식에서 사회에 관심을 갖는다. 관심이란 다른 사람의 가치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의하여 유지되며, 분리할수 없는 우리들 사이의 결속을 감지함으로써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지닌 개인적인 관점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공동선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공공생활의 질적인 향상은 구성원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에 달려있다.

공공생활에 종사하는 이들은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여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보낼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 세상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하느님 백성의 노력을 통하여 계속 표현된다. 세상속의 교회로서 평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형성하고 이 세상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육화하는데에 영향을 주는 결정들을 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

평신도들은 서품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하는 것처럼 고유한 분야에서 교회로서 말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을 건설해야 하는 자유를 우리가 인식하면 할수록 한계를 더욱 절실히 느끼고, 더욱 결사적으로 우리는 공동체를 갈망한다. 이 공동체는 우리들이 괸심을 쏟아야 할 사건들 주변에 형성된다. 우리는 여러가지 위기의 때에 또한 우리의 상호연민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건 주변에 함께 모인다.

사람들은 자발적인 단체로 공동의 이익을 나누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또는 같은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인다. 그러나 상업주의와 대중문화는 정부보다도 더 강력하게 우리를 갈라놓고 우리들 사이에 침투해 오고 있다.

공공생활이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부당하게 조작하지않고 다양함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공공생활은 어떤 개인이나 한 부분의 승리보다 더 위대한 전체의 승리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한 문제에만 매달리는 그룹은 모든 이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데 실패한 그룹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갈라놓고,모든 사람에게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강요한다.

[나눔과 섬김]

1. 나는 나의 공동체와 나라의 공동선을 위하여 일할 책임있다고 믿는가? 믿는다면 왜 그런가?

2. 나의 시간과 능력을 어떻게 공공생활에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경험이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하나?

3. 나는 나의 본당이 어떤 사회사도직분에 참여하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내가 속한 공동체는 결단을 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어떤 문제에 참여하기를 바라는가 ? 나는 그 문제에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

◦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는 내가 받은 능력의 선물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용케 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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