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제 전문가, 공자의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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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제 전문가, 공자의 분수
  • 한상봉
  • 승인 2019.02.1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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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13]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공자가 길을 가고 있었다. 얼마 후 큰 강이 나타났는데 나루터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저만치에 밭을 가는 사람이 보였는데, 혼탁한 세상을 떠나 숨어사는 ‘장저’와 ‘걸닉’ 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장저가 되물었다. “저기 수레에 올라앉아 점잖게 고삐를 쥐고 앉은 사람이 누구냐?” 공자라고 답하자 그는 더 이상 대꾸 없이 하던 일만 계속 하였다.

이번엔 걸닉이 자로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공자의 제자라고 답하자 그는 말했다. “온 세상이 물처럼 거세게 흘러가는데 누가 감히 고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자네도 나쁜 사람이나 피해 다니는 공자 같은 사람들 따르지 말고 차라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우리처럼 지내는게 어떠한가?”

자로는 머쓱해진 얼굴로 공자에게 되돌아와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했다. 그러자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큰 혼란기였다.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와 일꾼들을 얻으려고 전쟁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애써 찾았으며, 민중들은 가혹한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당하였고, 전쟁터로 내몰려 죽임을 당하는 일이 흔했다.

요한 묵시록(10,1-11)에서는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두루마리를 갖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 이야기를 전한다. 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10,6)을 찬양한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두 발은 바다와 땅을 디디고 있다. 세상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몫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전할 ‘복음’이 담긴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전했다. 그리곤 말한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10,9) 과연 요한이 두루마리를 삼켰더니 입에는 달지만 배를 아프게 했다. 그 다음에 요한은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10,11)에게 예언할 소명을 받는다.

공자는 하늘의 명을 받아 덕치를 행할 임금을 찾아 천하를 두루 다녔다. 공자에게 세상과 인간은 포기할 수 없는, 그러나 모질고 연민에 찬 대상이었다. 천명을 깨달은 자가 느끼는 법열은 대단할 테지만, 그 천명을 행하는 일은 안쓰럽고 고달프기 마련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지만 복음 대로 사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고난을 담보로 한다.

공자, 평범하면서 성인다운 생애

공자(기원전 551-479)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끼던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하였으며, 못된 인간들 앞에선 불같이 화를 냈다.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공자는 유가 사상의 대표자로서 한나라에서 신격화된 적도 있었지만, 사마천이 「사기」에 공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인간의 자리로 낮추어졌다. 그는 ‘인간관계’에 주목한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그 점에서 또한 성인다웠다.

공자는 중국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공(孔)씨이며, 자(子)란 선생님이란 뜻이다. 어머니가 니구산에서 빌어 공자를 잉태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구(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 숙량홀은 하급 무사였는데,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낳고 싶어 ‘안징재’(顔徵在)라는 나이 어린 소녀에게서 공자를 얻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을 ‘야합해서 낳았다.’고 적었는데 공자가 사생아인들 그 위대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무튼 공자는 젋었을 때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였으며,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도 하면서 꾸준히 독학을 했다.

35세에 고향을 등지고 여러 나라를 떠돌던 공자는 30여년 동안 무려 72명의 임금을 만났으나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의 정치에 의존하던 왕들이 도덕에 바탕한 ‘왕도정치’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고생길에 나섰다가 공자는 51세에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만, 얼마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천하를 떠돌다 68세에야 고향에 정착해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죽었다.

사람다운 사람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처럼 공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이나 귀신에서 ‘인간’ 문제로 돌리도록 만들었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공자가 답하기를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공자가 답하기를 “사람도 다 못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인(仁)이란 말은 「논어」에 106번이나 나오는 중요한 말인데, ‘인’은 두 이(二)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서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중용」에서 ‘인은 사람’이라 한다. 즉 어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뜻인데, 공자는 사람의 품격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논어」에서는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로 구분하는데,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이며,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이다. 군자는 남다른 사람이며, 본래 군주의 자식을 뜻한다. 따라서 임금은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군자 중에서도 어질지 못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서, 공자는 군자 위에 ‘인인’(仁人), 곧 ‘사람다운 사람’을 놓았다.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며,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사리사욕이 없기 때문에 ‘맞설 자가 없다’고 했다. 비겁한 사람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죽지만 뜻있는 선비는 제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루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성인’ 이었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어찌 사람답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결국 사람이란 제 이익을 찾기보다 정의로워야 하며, 공평무사하고 사랑에 넘쳐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하나로

공자가 살던 시대는 농경을 위주로 하던 봉건 사회였는데,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공사 경험이 많은 집안 어른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족 제도가 필요했다. 이런 가족관계가 사회적으로 넓혀져서, 종갓집인 천자와 작은 종갓집인 제후들,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서열이 차례로 매겨졌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람다움의 출발점은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였으며, 나아가서는 충과 서였다.

공자의 효는 사람의 감정에 따른 것이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스스로 편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가 죽은 뒤 자식들이 마땅히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상을 당했을 때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마음 편히 안락하게 거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충(忠)이란 본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충은 가운데 중(中)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써서 마음속에 중심이 하나일 때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식별하고 환경 변화나 이해관계에도 흔들림이 없으며 성실하게 소신껏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근심이 쌓인다. 그래서 근심 환 (患)자는 중(中)자가 두 개 겹쳐져 있는 것이다. 서(恕)는 같은 여(如)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두어, 아래 있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또 얼마나 힘들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하고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권한다.

[마무리 묵상]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가요, 하느님.
그런데 사람만이
절망을 안겨주는 건 또 왜인가요.
당신의 피조물을 욕되게 한다고
저희를 나무라진 마세요.
저희도 사람, 그네들도 사람이지만
사람이 다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지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해서
다 사람이라곤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람이란 태어나고도
한번 더 거듭 태어나야만
그제야 진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철이 들어야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그 사람만 보면 희망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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