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를 위한 장자의 가죽나무 이야기
상태바
가이아를 위한 장자의 가죽나무 이야기
  • 한상봉
  • 승인 2019.01.29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시아 종교심성으로 읽는 요한 묵시록-12]

짧은 노래
-
류시화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야지
풀잎만큼의 높이라도
서둘러 내려와야지
벌레처럼 어디서든 한 철만 가야지
남을 아파하더라도
나를 아파하진 말아야지
다만 무심해야지
울 일이 있어도
벌레의 울음만큼만
울고
허무해도 벌레만큼만 허무해야지
죽어서는 또
벌레의 껍질처럼 그냥 버려져야지

 

사진출처=pixabay.com

​[오늘의 성경] 요한묵시록 8,1-9,21

일곱째 봉인을 떼기 전에

“그 천사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향에 섞어 옥좌 앞에 있는 황금 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아 들었습니다.”(묵시8,3)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성도들의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을 그저 심판하고 끝장내 버리라는 청원일까, 아니면 아직도 기회가 있다면 세상이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회심하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하느님께서는 늘 한 손에 칼을 드시고도 주저하고 계시며 쌍날칼을 힘주어 잡으시면서도 여지를 주신다.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마음도 무거우신 것이며, 성도들의 기도는 그만큼 간절해지는 것이다. 돌아서라, 돌아서라, 제발 돌아서라. 어린양이 일곱째 봉인을 떼기 전에 돌아서라.

쑥대밭이 된 지구

묵시록에서 요한의 환상은 일곱째 봉인이 떼어지고, 여섯 명의 천사가 나팔을 불면서 세상은 온통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우박과 불덩이가 피범벅이 되어 땅에 떨어져 땅과 나무와 푸른 불이 타버렸으며, 불붙는 산이 바다에 떨어져 바닷물이 피가 되고, ‘쑥’이라는 이름을 가진 별이 떨어져 사람들이 쓰러져 갔으며, 독수리가 하늘을 맴돌며 “화를 입으리라, 화를 입으리라. 땅 위에 사는 자들은 화를 입으리라.”(8,13) 하고 외쳐댔다.

메뚜기들이 온 땅에 퍼져서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의인들만 빼고는 모든 사람을 다섯달 동안 괴롭히는데,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9,4). 그리고 결국엔 천사들이 거느리는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음을 당한다. 이런 재앙을 당하고도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끊임없이 마귀를 경배하며 금, 은, 구리, 돌, 나무로 만든 우상에 절을 했다.

일곱째 봉인이 떼어지고 나타난 현상은 한마디로 온 지구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모두가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 때문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도무지 뉘우칠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지경이다. 그들은 여전히 황금을 숭배하며, 예전의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여전히 다투고 있다.

장자의 가죽나무 이야기

혜자가 장자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일컬어 가죽나무라 하지요. 줄기에 옹이가 많아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는 뒤틀리고 굽어서 그림쇠로 잴수가 없는지라 길가에 서있건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오.” 이 말을 듣고 장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 또한 너구리와 살쾡이를 보았을 것이오. 몸을 낮추어 엎드려 있다가, 나와서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을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높고 낮은데를 가리지 않지요. 그러다가 올가미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 죽소. 그런데 저 검은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서 크기는 과연 크나 쥐를 잡지는 못하오. 지금 그대는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서 탈이라고 하니, 어째서 그 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시골의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하는 일 없이 거닐며 노닐다가 그 그늘에 누워 잠들지 않는게요? 도끼에 찍히지도 않으니 쓰일 데가 없다 하여 어찌 괴로워할 바 있겠소?”

눈앞의 이익만을 노리면서 천방지축 비지땀을 흘리다가 결국엔 더 큰 이익을 노리는 자들한테 먹이가 되는 살쾡이처럼, 제 쓸모만 따져서 만사를 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를 경계하는 성현의 말씀이다. 가죽나무를 그저 목수의 잣대로만 볼줄 알지, 그 나무 밑에서 쉬어 갈 줄 모르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씀이다. 이를 두고 ‘무용지물’이라 하는데,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정작 더욱 크게 쓸모가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동안 산업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면서 제 한 몸에 이익이 돌아온다면 뭐든지 상품으로 개발해 왔다. 골프장이 돈을 벌어준다면 주저 없이 산림을 베어내고 산 곳곳을 파헤친다. 상품을 옮길 자동차 길을 만드느라고 가슴에 구멍 나고 상처 입지 않은 산맥이 없으며, 땅속엔 거덜나지 않은 자원이 드물다. 하늘이며 땅이며 물을 오염시키고, 마실 물조차 이젠 상품화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인류의 숨통을 조여오고, 지구 생태계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한다. 지구 자원은 단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마구 잘라내고 쓸어버려도 좋은 물건이 아니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동시에 인간도 파괴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도 인류의 파멸을 막고, 그야말로 말세를 늦출 수 있으리란 희망이나마 있을 텐데.

 

사진출처=pixabay.com

땅의 여신, 가이아는 살아 있다

영국의 기상학자 제임스 러브로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의 이름으로 지구를 불렀다. 지구라는 행성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며, 우리 인간들과 수백만의 생물들은 그 유기체의 세포와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이 지구는 35억년동안 생존해 왔는데, 최근에 인간들의 산업 문명 때문에 매우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가이아인 지구는 우리 없이도 살아 남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지구 없이 하루도 살아 남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러브로크는 가이아(지구)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통제해 왔는지 설명해준다. 지구상의 생명들은 굉장히 좁은 범위의 온도, 즉 섭씨 0도에서 섭씨 50도 사이에서만 살 수 있다. 그런데 뜨거운 태양열에 상관없이 이 지구가 지금처럼 쾌적한 체온을 유지해 온 것은 특별한 비결이 있었다. 지구의 열을 높이는 탄산가스를 석탄이나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 퇴적물의 형태로 땅속에, 그리고 거대한 열대우림속에 저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나 총명하고 자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들은 열대 우림을 불태우고, 숲을 깎아 농토로 만들어 흙을 고문하고, 석탄과 천연가스를 죄다 끄집어 내어 불태워 버리면서, 그 모든 탄산가스를 다시 대기중에 되돌려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전세계는 기상, 기후가 불규칙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비가 내려야 할 곳이 건조해지고,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난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열대우림이 심각하게 훼손된 중남미에선 건조한 날씨여야 할 때 몇 개월 동안 계속 비가 내리고, 바로 이웃나라에서는 몇 개월 동안 가뭄이 든다. 유럽에서는 당연히 추워야할 때 더워지고, 더워야 할 때 추워진다. 이것은 앞으로 닥칠 보다 심각한 자연 재앙의 전조인지도 모른다. 산업 사회가 인위적으로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지구의 자기 조절 기능이 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있다.

우리는 탄산가스를 더 많이 만들어 내고, 공기를 오염시킨다. 특히 열대 우림의 파괴는 지구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 비가 우림지역에 내리면 보통 40시간 안에 그 빗물의 70퍼센트가 증발되면서 땅을 식힌다. 그리고 공기 중에 습기가 많아져서 구름이 만들어지면 양산처럼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기도 하고, 비가 되어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숲이 벌채되고 벌거벗은 땅거죽만 남게 되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적도의 태양 광선이 땅을 섭씨 50-60도까지 데우게 된다. 그러면 새로운 구름을 만들고 계속 비를 내리게 해주는 순환운동은 멈추고, 뜨거운 가뭄이 계속 되는 것이다.

밀림 지대 였던 아프리카에 사막이 넓어지고, 수렵과 열매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척박한 땅에서 굶어죽어 가는 소말리아를 보라. 우리의 행동은 큰 비행기의 조종석에 앉아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장난치는 원숭이들과 비슷한데, 그 비행기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면 우린 과연 무얼 해야 하는 것일까.

가이아(지구)가 온실이 되어 더워지고 있다. 얼마 안 있어 갑자기 습한 열대 지역에서 수십억 또는 그 이상의 인간들이 화씨 120도의 기온 속에서 가뭄과 홍수를 견뎌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바다로 달려서 물에 빠져 죽은 가다라의 돼지들처럼(마태 8,28-34), 대기오염을 일으키는 자동차를 몰고 점점 뜨거워지는 바다를 향하여 정신없이 내리막길로 질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일곱 번째 나팔소리가 들리기 전에

우리가 숨쉴 산소를 소리없이 내뿜고 있는 장자의 가죽나무를 베어 땔나무로 쓰거나, 건축자재나 장난감을 만드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자의 검은 소를 희롱하며 먹이를 찾아 연신 눈망울을 굴리며 뛰어다니는 동안에 우리는 남은 목숨을 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돌보고 건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만사를 돈으로 계산하려는 못된 버릇을 고칠 때 인류에게는 미래가 있다. 우리가 총명한 머리로 지구에 장난을 거는 동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마저 불어버린다면 누구도 그 재앙을 막을 수 없다.

[마무리 묵상] 

사람이 살기 전부터
살아왔던 이 땅의 짐승이며 나무들,
우리를 알기 전부터
조상을 먼저 사귀었던
우리 조상들의 친구였던 그 산맥과 강과 바다,
쉬임없이 피고 지며 조상 대대로
자손 만대로 바람을 섞을 꽃과 풀포기,
우리의 조상이 몸을 맡기고
우리의 복을 빌어주던 흙과 모래의 박테리아까지
그네들은 우리와 영영
헤어질 수 없는 배필임을 잊지 않도록
주님, 우리 하느님
도우소서,
우리 마음이 변하게서리.
당신께서 우리에 앞서
자연사물을 지구에 먼저 낳으셨음을
우리가 알아듣게 되는 날,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창조주 우리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