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머릿 속을 맴도는 딸아이의 질문
상태바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머릿 속을 맴도는 딸아이의 질문
  • 유수린 김정은
  • 승인 2019.01.14 13: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수린과 김정은의 <딸그림 엄마글> 다섯번째 이야기]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초등학교 1학년 ‘자기소개 하기’ 숙제를 하다 말고 아이가 불쑥 물어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반 친구들 앞에서 자기소개 하기는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엄마 어릴 땐 어땠냐고 이야기를 들려 달랍니다.

“내 이름은 유수린이야. 화가가 되고 싶어서 매일 그림을 그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생애 처음으로 상을 받은 수린(6세). 사진=김정은

제가 먼저 모범을 보였습니다. 아이는 맘에 들었는지 거울 앞에서 엄마를 따라했습니다.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아이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때로 돌아갑니다. 집 밖에서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아이, 말을 걸기라도 하면 볼에서 귀까지 새빨개지던 아이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내성적이었던 아이가 엄마가 돼 아이 앞에서 큰 소리로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초여름, 저는 전학을 갔습니다. 새 학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버스로 세 정류장이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등교해야 했습니다. 하굣길에 전학생이 길을 잃어버릴까 봐,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에서 가장 똑똑하고 예의 바른 남학생을 한 명 붙여 주셨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일주일 동안 그 남학생과 저는 손을 꼭 잡고 걸어야 했습니다. 어색해서 뻣뻣하고 더워서 땀까지 줄줄 흐르는 손을 차마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매너도 좋아서 인기가 많았던 그 남학생과 손을 잡고 다녔다는 건 같은 반 여자 친구들의 미움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일주일 후, 집으로 가는 길은 알게 됐지만 저는 혼자가 됐습니다. 하굣길 먼 길을 혼자 걸을 때면 오직 햇살 한 자락과 바람 한 점만이 조용히 말을 걸어 올 뿐이었습니다. 햇살 한 자락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바람 한 점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그때 알았습니다.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 새 집이 보이곤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있을 때면, 두 손을 마주 대고 비벼 손 끝 온기 친구를 불러냈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어주고 길을 안내해주던 고마운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입 안 가득 내뱉지 못한 말들을 일기장에 털어놓곤 했습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가끔 일기장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은이는 시인이구나!’

“으응. 엄마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

 

엄마(8세 때의 그림). 사진=유수린

 

수린이가 그림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엄마를 그렸답니다. 그림 속 제 모습이 제법 그럴싸합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바르고, 무늬가 있는 치마와 레이스 달린 재킷을 차려 입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서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머리 위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는 아직 지지 않은 어릴 적 꿈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한 손에는 책이 들려 있습니다. 엄마가 쓴 책이랍니다.

뒤에는 빨간색과 흰색으로 장식한 화려한 포토 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유명 영화배우들이나 설법한 포토 존에서 이제 막 작가로 데뷔한 엄마가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연필, 지우개, 압정, 핸드폰, 노트, 클립, 집게, 필통 모양을 한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합니다. 찰칵찰칵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 색 꽃들이 팝콘 터지듯 팡팡 피어납니다.

아아, 그림 속에 아이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림으로 엄마에게 어릴 적 꿈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끝이 찡해집니다. 그림을 액자에 끼워 책상 앞에 걸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다시 아이만 했을 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다시 햇살 한 자락과 바람 한 점, 손 끝 온기 친구를 불러내야겠습니다. 잊힌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야겠습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가야겠습니다. 언젠가 어릴 적 꿈을 이루는 날이 온다면, 제 손에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베이비뉴스(ibabynews.com)에 먼저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딸그림' 유수린 엘리사벳: 오직 아름다운 것에만 끌리는 자유영혼의 소유자,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은 열 살 어린이입니다.

'엄마글' 김정은 글라라: 수민, 수린 두 아이의 엄마「엄마의 글쓰기」(2017) 저자, 아이들과 보낸 일상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합니다.

<가톨릭일꾼> 종이신문을 구독 신청하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