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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으로 부르심 받은 평신도<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018) 현대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황권고 1장 해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박해받거나 모욕당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며 그 보상으로 우리에게 참생명을, 우리가 창조된 이유인 행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프란치스코 교종,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항)

“우리는 시대는 성인을 요구한다.”는 게 프란치스코 교종의 생각이다. 어느 시대에나 문제는 많았지만, 교종은 특별히 우리시대의 핵 위험과 환경문제, 경제독재가 빚어내는 경제 불평등, 전쟁과 난민 문제, 종교와 정치적 갈등, 세속화와 거룩함에 대한 무감각은 결국 인간과 삶의 터전인 세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 ‘성덕’을 다시 거론한다는 게 시대착오적인 태도라고 조롱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중세기에나 어울릴 법한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이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고 그 보상으로 행복”을 주신다는 하느님, 여기서 행복은 우연적이며 순간적이며 감정적인 차원에서 즐거워하는 ‘행복’(happiness)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은 ‘축복’(blessing)이다. 하느님 안에 온전히 잠겨, 그분의 현존 안에서 그분과 동반하는 기쁨이다.

 

‘옆집’의 성인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창세 17,1) 이런 성덕을 지닌 이를 우리는 ‘성인’이라 한다. 그러나 교종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를 발표하면서, “이미 복자나 성인이 된 이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6항)라고 말한다. 오히려 ‘옆집’의 성인에 주목한다. 우리는 그동안 영웅적 덕행의 표양이 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고, 제 삶을 다른 이에게 기꺼이 내어주고, 마침내 교회에서 인정받은 ‘공식적’ 성인들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교종은 “그들의 삶이 늘 완벽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의 잘못과 실패 가운데서도 계속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고, 주님의 마음에 든 이들”을 이웃에서 발견한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드러나는 성덕이 보기 좋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 병자들,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노(노)수도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에게서, 저는 투쟁교회의 성덕을 봅니다. 이는 우리 옆집 이웃 안에서 발견되는 성덕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성덕의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7항)

그들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친숙하기 때문이고, 본디 성인은 자신을 힘주어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익명의 성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칠흑같이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과 성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비적 삶의 생생한 흐름은 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세계 역사의 결정적 사건들은 본디, 어떠한 역사책에도 언급된 적이 없는 영혼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가려져 있던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 날에야 우리는 개인 생활에서 결정적 은혜를 입은 그 영혼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교종은 “성덕은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면서, 가톨릭교회 밖에서도 성령께서 움직이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톨릭교회 바깥에서 발견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은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가 2000년 5월 7일 콜로세움에서 봉헌된 ‘20세기 신앙의 증거자들을 대한 교회일치 기념미사’ 강론에서 제시하였다. 교종은 이날 1만 2,692명의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였다.

이 선포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 등 교파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그중엔 나치에 의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에디트 슈타인 수녀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를 비롯하여, 1980년 산 살바도르에서 살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등이 포함되었다.

 

만인을 성덕으로 부르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성인이 되라고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베드 1,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크고 많은 구원을 수단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습니다.”(교회헌장 11항)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 자기 길에서” 부르심을 받는다. 하느님의 생명은 어떤 이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저런 방식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기뻐하고 즐거워하라> 11항) 하느님은 오래동안 무시되고 차별받았던 여성들에게도 성인을 일으키신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비르지타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이 대표적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심지어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다고 전한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 1,5) 니카라과의 시인이며 혁명가였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태초부터 갈망해 오셨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감동적인 하느님의 자비인가.

교종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14항)고 단언한다.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름받고 있다”(14항)는 게 교종의 생각이다. 성덕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으로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부인이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가 이웃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데 남을 흉보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합니다. ‘아니야,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입니다.”(16항)

성덕은 불쌍한 사람에게 친절한 말 한 마디 건네는 데서 시작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신애론>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통상적인 일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완수하게 하는 영감들이 있다.”고 했다. 이런 성덕이 쌓이면 결정적인 순간에 남과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옥살이를 하면서 풀려날 날만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일상의 행동을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하자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리라.” 반 투안 추기경은 베트남이 공산화 되면서 교구에서 하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왜 그토록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사업)을 구분해야 한다. 네가 마친 일과 계속해서 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 곧 사목 방문과 신학생과 수도자, 평신도와 젊은이 양성, 학생들을 위한 학교와 휴게실 건설, 믿지 않는 이들의 복음화 사명은 훌륭한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길 바라신다면 즉시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하느님을 믿어라!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하실 것이다. 그분은 네 일을 너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너는 하느님을 선택했지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바오로딸, 2011)

 

더 생기 있게, 더 인간답게

성덕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 삶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 공생활, 가장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하신 모습, 그분의 가난, 그리고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다른 여러 방식들을 우리 삶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교종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속량의 신비’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살며 겪으신 모든 것을 우리가 당신 안에서 그대로 살게 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살며 겪으신다.”(20항)고 한다. 그분은 결국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덕이란 교종 말마따나 “다름 아닌 충만하게 실현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교종은 성인이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성인의 행적이 전부 다 진정성이 있고 완전한 것만은 아니”(22항)라는 것. 다만 그분들의 온 생애 여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실수하더라도 실수에 머물지 않는 것이 성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흠결 많은 우리도 따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지르는 수많은 실수와 과오 속에서도 여러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사랑의 길을 저버리지 말고 정화하시고 빛을 비추어 주시는 그분의 초자연적인 은총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24항)

아울러 교종은 사랑의 길에서, 예수님이 추구하신 것이 오로지 하느님 나라였음을 지적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을 제 것으로 삼으려 한다면, “만인을 향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이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건설할 임무가 포함된다.”(25항)고 말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 이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교종은 덧붙인다. 이런 점에서 “사목적 헌신이나 세상 속에 투신하는 일이 마치 성화와 내적 평화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분심거리’인 것 마냥 이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유혹”(27항)을 경계한다.

그러나 교종이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순간들을 경시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종은 “행동 속에서도 관상을 실천하고, 책임감 있고 관대하게 우리 고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26항)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슬로건처럼 ‘관상 가운데 실천하고, 실천 가운데 관상하라’는 말이다. 교종은 오히려 우리 세계가 “수많은 말과 피상적 재미, 점점 더 빨리 커져가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이 광란의 질주를 멈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참된 자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면 철저한 고독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성덕의 정신이란 혼자 있는 시간만큼 봉사에 헌신하고, 사생활만큼 복음화 활동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매 순간이 주님 보시기에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성화의 길을 따라 나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31항)

교종은 ‘나 홀로’ 하느님을 만나고, 여럿이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영성을 높이 평가한다.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이는 자신의 영성도 풍요롭다는 이치다. 그러니, 정말 행복을 원한다면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성인을 희망하는 자는 뭔가 즐거움을 포기하고, 누추한 삶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성덕을 미리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교종은 “성덕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한다. 성덕은 우리의 “활력과 생기, 기쁨을 앗아가지 않을 것”(31항)이다. 오히려 레옹 블루아가 <가난한 여자>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덕은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고, 우리의 나약함이 은총의 힘과 만나게 한다.

“더 높은 데를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대로 담대하게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34항)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쌓은 성덕만큼 세상에 유익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갈망해 오신 하느님은 지금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고 계신다. 당신 정원에 머물며 온갖 세상에 좋은 일을 하라고 친절하게 손짓 하신다. 서아프리카 주교들은 2016년 주교회의 정치총회를 마치면서 성덕을 통해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의 정신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곧, 스스로 복음화 되고 세례받은 여러분 모두의 힘으로 복음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여러분의 역할을 받아들여 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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