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연대는 동의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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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연대는 동의어입니다
  • 유형선
  • 승인 2018.12.3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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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성탄과 연말을 맞고 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을 봐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국 사회가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촛불혁명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2018년 겨울을 보내면서 자신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낸 세 명의 노동자 이름을 헤아려 봅니다.

 

고 김용균 노동자

김용균, 나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입니다 

첫 번째 노동자는 故 김용균입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입니다. 12월 11일,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 석탄 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연 평균 2400여명 노동자가 산업현장에서 사망하고 있는 OECD 산재사망률 1위 국가입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거의 100% 하청노동자 사망입니다.

노동현장의 위험을 개선하기보다 하청기업에 작업을 맡겨서 위험을 떠넘기고 있고, 하청기업은 떠맡은 위험한 작업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하청기업들은 대부분 수익구조가 열악합니다. 위험한 작업 현장일수록 2인 1조로 일해야 하지만 대부분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김용균 노동자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려 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열흘 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조합 캠페인에 참가해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피켓을 들고 인증사진을 찍었습니다. 피켓에 ‘나는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도 적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이 사진이 고인의 영정사진이 됐습니다.

12월 27일, 이른바 ‘김용균법’으로 불렸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개정한 산업안전보건법은 직업병 발생 위험이 큰 도금과 수은, 납, 카드뮴 등의 위험작업의 사내 도급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김용균씨가 수행했던 작업이나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의 사망사고 같은 일은 도급 금지 대상이 아닙니다.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 점은 기쁜 일이지만 ‘김용균법’에 ‘김용균’이 빠진 셈입니다. 대한민국국회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염원을 따라오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사진=신유아

홍기탁 박준호, 굴뚝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410일이 넘도록 75m 굴뚝을 지키는 홍기탁 노동자와 박준호 노동자의 이름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측과 교섭이 결렬되고 노조원이 5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너무나 억울해서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아프고 억울한 마음을 드러내 굴뚝을 십자가 삼아 자신의 몸을 하늘 높이 매달았습니다.

이번 겨울이 굴뚝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입니다. 성탄을 맞아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도 경신했습니다. 굴뚝 위 약 1미터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얼기설기 설치한 천막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전기도 없습니다. 패딩과 핫팩으로 한파에 맞섭니다. 의사와 한의사 분들이 올라가 보니 들쳐 올린 패딩 밑으로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날 만큼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홍기탁 노동자와 박준호 노동자가 하늘 높이 매달아 세상에 드러낸 아픔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길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종교계가 나섰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나승구 신부님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박승렬 목사님이 찾아와 기도와 단식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종교계 분들 덕분에 노사교섭도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사진=한상봉

아픔을 드러내는 행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신앙인들은 때때로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드립니다’라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기도를 부탁드린다’는 말은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약하고 어두운 곳을 남들에게 드러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용기를 내어 기도를 부탁드리는 까닭은 왠지 이분들이라면 이야기를 듣고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픔에 공감해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드러내는 행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 사람만이 아픔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기에, 무엇이라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여리고 쓰린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드러낸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 안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울다 지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슬러 봅니다. 밖으로 드러낸 아픔이 조금씩 길을 만듭니다.

흔히 약속을 하는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서로 겁니다. 다섯 손가락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손가락이 새끼손가락입니다. 가장 여리고 약한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있는 사람들만이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기에 함께 하는 게 아닙니다. 여리고 힘이 없는 존재이기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연대도, 여리고 약한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와 연대는 동의어입니다.

세 명의 노동자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드러난 아픔을 외면할지, 아니면 기도와 연대로 부둥켜 끌어안을지, 이제 선택할 차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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