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바에즈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라”
상태바
존 바에즈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라”
  • 한상봉
  • 승인 2018.12.30 23:5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4년 봄, 인천 제물포역 인근의 커피숍 ‘베아트리체’에서 DJ박스 안에서 턴테이블에 레코드판을 올렸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대학생이 되면서 인천 미추홀 검정야학과 영등포역 인근에서 노동야학 교사로 있었다. 더불어 학교와 성당에서 가톨릭대학생회 활동을 했던 때였다. 당시 머릿속 키워드는 노동과 혁명과 해방신학. 일제하 독립운동 하던 기분으로 ‘운동권’에 있었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휴학계를 내고 몇 달 간 인천에서 커피숍 디제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 시간이 되면 오프닝 곡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을 틀거나 양희은의 <상록수>를 돌렸다. 엔딩 곡으로는 남몰래 복사판 녹음테이프로 돌던 김민기의 <친구>를 틀었다. 김호철의 행진곡 풍 민중가요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가 들었던 노래는 대부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애잔한 노래들이었다. 그리고, 데모할 때 동료들과 어깨를 걸면 항상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흔들리지 않게>와 <우리 승리하리라>였다. 이 노래를 미국에서 존 바에즈가 불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존 바에즈(Joan Baez)는 1941년 1월 9일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존 브리지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아버지 앨버트 바에즈는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태어난 미국으로 온 이민자다. 뉴욕 이타카의 코넬대학에서 연구물리학자로 있던 아버지는 군사전략과 관련된 방위산업체 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도덕적 갈등을 느끼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적을 장로교회에서 버펄로에 있는 퀘이커교당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여기서 반전론자가 되어 유네스코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런 부모의 태도가 존 바에즈에게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타임>지 커버사진에 실린 존 바에즈. 1962년

바에즈는 1962년 시사주간지 <타임>과 인터뷰하면서 “이제껏 공화당원 중에는 좋은 포크가수가 나온 적이 없다”고 말할 만큼 당돌하고 급진적인 여성이었다. 바에즈는 강한 신념으로 노래하는 가수였고, 타고난 목소리와 멕시코계인 아버지로 인한 가무잡잡한 피부에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으며, 맨발로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다른 가수들과 다른 매력을 발산시켰다.

언니 폴린과 동생 미미 등 세 자매가 다 진보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 이들은 1968년 징집 반대 포스터를 만들면서 도발적인 어조로 문구를 적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자애들은 ‘노’라고 외치는 남자애들에게 ‘예스’라고 말한다”였다. 여자를 얻으려면 반전주의자나 저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틴 루터 킹을 만나다

“간디는 말했다. 인도가 해야 할 일은 영국의 총구 앞에 놓인 인도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이며, 동시에 영국의 총구 뒤에 놓인 영국인들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똑같은 규칙이 미국 남부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킹이 백인들도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이다.”(<존 바에즈 자서전>, 삼천리, 2012, 200쪽)

존 바에즈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흑인들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를 보장하는 강력한 민권법안을 요구했다. 그해 8월 28일, 뙤약볕 아래서 25만 명의 군중이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집회를 워싱턴 링컨기념관 근처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서 킹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킹은 이제 흑인들이 겪어온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호소했다.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이라고 했다.

 


연설이 끝나자 밥 딜런(Bob Dylan)이 <초라한 보병>(Only a Pawn in Their Gam)을 부르고,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and Mary)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을 불렀다. 이윽고 존 바에즈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르자, 25만 군중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한국에서 1971년 김민기가 서울대 신입생환영회에서 처음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대표적인 운동가요가 되었다. 존 바에즈는 이미 1961년부터 밥 딜런과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에즈는 흑인들이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계약까지 요구하며 미국 남부를 돌며 콘서트를 열었다.

1962년 앨라배마의 버밍햄에 있는 어느 침례교회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이날 교회당에 모인 교인들은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자유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고 바에즈는 기억한다. 이들은 아이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감옥에 갇히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나는 늘 배웠어요. 아니고말고요. 우리 위대한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예를 본받아 감옥에 가는 것은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윽고 바에즈는 설교단에 올라가 <우리 무릎 꿇고 함께 빵을 먹읍시다>를 불렀다. 

한편 마틴 루터 킹은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강력하게 비폭력을 호소했지만, 1968년 4월 4일 백인 과격파인 제임스 얼 그레이에게 암살당했다. 존 바에즈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여전히 지금도 그분과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도 그의 영혼이 가슴에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나의 희망이자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 나의 길이 다시 명확해지길 기도해요. 다시 거리로 나갈 수 있도록 헌신과 방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기를,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나이와 죽음과 모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끝내기를 기도해요. ... 당신의 목소리는 늘 나를 산기슭으로 다시 데려가 주죠.”(자서전, 219쪽)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다

1963년 11월 어느 이른 아침, 존 바에즈는 식료품을 사다가 점원에게서 “케네디가 총에 맞았다는군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줄곧 맨발로 무대에 섰지만, 가수로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녀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노래만 하기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던 순간이다.

“나는 음악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러하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이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인류가 서로 죽이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 되겠죠.”

케네디가 암살당한 다음날, 예정되어 있었던 대통령을 위한 갈라쇼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바에즈는 노래 한 곡을 재클린 케네디에게 헌정했지만, 국가를 부르지는 않았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에즈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네>를 부르며, 은근히 미군이 동남아에서 벌이는 전쟁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전했다. 바에즈는 존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면서, 미 행정부가 군대를 철수하면 민주당에 투표할 생각이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나 1972년에 닉슨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기 전까지 바에즈가 투표소에 갈 일은 없었다.

그는 정당과 정치인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충성은 국가에 대한 것이어야 했다. 중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미국인이든 또는 탄자니아인이든, 그들은 가기들이 태어난 우연한 출생지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며 ‘국가주의’가 어떤 참극을 빚어내는지 비판했다. 특히 강력함 힘을 지닌 나라의 국가주의는 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바에즈가 보기에, 베트남에서 미군의 존재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녀는 즉각 국방세 납부를 거부하고, 국세청에 편지를 썼다.

“나는 전쟁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전쟁무기를 믿지 않습니다. 무기와 전쟁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너무도 오랫동안 살해하고, 불태우고, 괴롭히고, 망가뜨리고, 끊임없이 다양한 고통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현대의 무기들은 한 남자를 눈 감작할 사이에 먼지 부스러기로 바수어 버릴 수 있고, 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거나, 그녀의 아이를 괴물로 태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나는 자발적으로 내 연 소득세의 60퍼센트를 군비로 내지 않을 것입니다. 내 행동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비실용적이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국가안보’라는 표현은 헛소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방위 체계’를 가리킨다고 하지만, 그건 웃기는 소리입니다. 나는 그것을 ‘공격 체계’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끝없이 확장되고 있고, 하나의 끔찍한 살인 기계 위에 다른 살인기계를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누군가가 단추 하나라도 누른다면, 우리의 세계가 혹은 세계의 많은 부분이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어 버리겠지요. 이건 안보가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존 바에즈 자서전 228-229쪽)

존 바에즈는 미군이 전쟁을 수행하고, 미국이 무기를 개발하는 동안 가난한 나라의 민중들은 굶주리며 미국을 경멸하고 있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나 자신의 한계를 긋는 일뿐”이며 그래서 “더 이상 군비경쟁에서 내 몫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편지를 바에즈는 언론에 공개했다.

국세청 직원은 “바에즈 양, 당신은 나쁜 국민이 되고 싶진 않으시겠죠?” 하고 물었다. 바에즈는 성격상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내가 보기엔 좋은 국민이 되느냐, 아니면 좋은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일 것 같군요. 만약 좋은 국민이 된다는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떨어뜨릴 네이팜탄을 만들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차라리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할 거예요.”

국세청 직원이 질문이 이어졌다. “당신은 분명 감옥에 가고 싶진 않겠죠?” 이 불길한 말에 바에즈는 “글쎄요, 나는 언젠가 감옥에 가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말로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을까요?” 직원은 격앙된 어조로 “감옥은 나쁜 사람을 위한 곳이죠! 범죄자들을 위한 곳이라고요!”하며 경고했다. 바에즈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간디? 소로?”

국세청은 바에즈의 집과 차와 땅을 압류했다. 그 후로 10년 동안 국방비를 한 푼도 내지 않았는데, 국세청 직원들은 콘서트 장소까지 찾아와 주최측에게서 세금에 벌금까지 가져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 바에즈가 양철컵을 들고 거리에 나앉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납세거부운동이 확산되었고,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져갔다.

 

비폭력, 공부와 명상과 투쟁

존 바에즈는 ‘누군가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더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폭력연구소’라는 학교를 만들어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한 명은 채식주의자이며 절대적 평화주의자인 홀리 치너, 그리고 서점을 운영하던 로이 케플러였다. 케플러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대체복무로 정신병원에서 일했고, 한국전쟁 때는 감옥에서 노역한 아나키스트였다. 그들은 카멜벨리 한복판에 건물을 찾아내 세미나를 열기 시작했다. 이 집에는 만 4년 동안 공산주의자에 히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세미나에 앞서 10~20분 동안 묵언 명상을 했으며, 비폭력의 개념과 역사, 운동론 전체를 훑어보았다.

존 바에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읽고 토론하고 명상에 잠기면서 매우 영적인 상태에 머물렀다. 며칠 동안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느라 발이 코끼리처럼 붓기도 했다. 당시에는 1년에 스무 번 정도만 콘서트를 열었으며, <안젤리나여, 안녕>(Farewell, Angelina)와 크리스마스 음반인 <노엘>(Noel)을 녹음했다. 버는 돈은 대부분은 기부했고, 비폭력운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수천 달러에 이르는 돈을 기꺼이 기부했다. 콘서트는 협동조합 보육원, 퀘이커 예배, 평화단체 등을 위한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음반수입이 꾸준히 들어왔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 않았고, 따라서 기부 액수에도 한계가 없었다.

바에즈는 당시 상황을 “내 삶은 심원한 기쁨으로 충만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입을 때까지 내 개인적인 즐거움이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존 바에즈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만화가 앨 캡(Al Capp)은 바에즈가 “슬쩍 좌파적인 색깔로 위장한 채 자기는 리무진을 타고 1만 달러짜리 출연료를 받는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입으로는 ‘빈곤과 굶주림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래’를 부르는, 두 얼굴을 가진 너절한 계집애”라고 표현했다. 물론 바에즈는 롤스로이드를 탄 적이 없으며, 이런 중상모략에 분개했다. 

이 사건에 대해 바에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나의 정당한 분노는, 비록 가진 돈의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다 해도, 어쨌든 내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에즈 안에 있는 청교도적 성향은 “내가 간디처럼 무소유로 사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간디처럼 완벽해질 수 없다. 간디의 목표는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 역시 벗어나려고 애셨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낳기도 했다. 

존 바에즈는 비폭력 평화주의 안에서 많은 이들과 정신적으로 교류하였는데, 그중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던 ‘가톨릭일꾼’의 도로시 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을 연재했던 저명한 평화주의자이며 수도자였던 토머스 머튼도 있었다.

바에즈가 1967년 켄터키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머튼은 명랑하고 친절했다. 따뜻하고 정직함이 묻어 나왔다. 머튼이 혼자 사는 오두막에서 친구 아이라와 바에즈는 머튼과 위스키를 마셨다. 바에즈는 머튼에게 다소 도발적이었다. “어중된 지식을 내세우는 지루한 하급 수사들이 당신을 신으로 우러러보는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돌아 버릴 것 같지 않아요?”

수도원에선 머튼의 사회적 발언을 마땅치 않게 여겼지만, 머튼은 그래도 자신의 소명이 이곳 수도원에 있다고 했다. 머튼이 당시 사랑하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바에즈는 그 여인을 어찌 할지 물었다. “나는 그녀를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소!” 하자, 바에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돼요. 그녀의 육체는 어떻게 하고요?” 바에즈는 함께 렉싱턴에 있는 그녀를 찾아가자고 머튼을 다그쳤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리하면 모두가 후회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바에즈, 고통받는 곳 어디에나 있었다

음악평론가인 앤서니 드커티스는 “1960년 첫 앨범이 발매되고, 1985년 필라델피아에서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자선공연이 열렸을 때까지, 존 바에즈는 오직 ‘그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디에든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바에즈는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서 루터 킹과 나란히 행진을 했으며, 베트남전쟁 반대투쟁의 현장 어디에나 있었다. 그 뒤로는 베트남과 스페인, 아르헨티나, 폴란드에도 있었다. 존 바에즈는 평생에 걸쳐 ‘인권과 평화운동’에 관련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온 힘을 다해 기꺼이 도왔다.

1972년 바에즈가 베트남 하노이에 갔을 때 미군의 B-29폭격기가 11동안 ‘크리스마스 폭격’을 감행해서 죽을 뻔 했다. 미군의 폭격은 북베트남을 생지옥으로 만들고, 그들의 마을을 태우고, 아이들을 네이팜탄으로 공격했다. 이 공습을 보고 바에즈는 “아마도 닉슨이 보낸 때 이른 크리스마스 소포인가 보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바에즈는 방공호에서 <쿰바야>를 불렀다. 그곳에서 바에즈는 성치 않은 다리로 포격 구덩이 속에서 아들을 찾아 헤매는 여인을 보고 <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나?>(Where Are You Now, My Son?>라는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은 베트남 국민에게 보내는 선물이며, 거기서 살아 돌아온 데 대한 감사의 기도였다. 이 타이틀곡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 방공호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내게 어떤 선물을 주었던가.
내게 미소를 지어 주고 조용히 당신들의 고통을 나누게 해 주었지.
나는 그저 완전한 겸허함으로 절을 하며
우리가 일으킨 일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또 구할 뿐이라네”

프랑코 총통이 죽고서야 1977년 스페인을 처음 방문해 바에즈는 반파시트 저항운동을 노래했다. 특별히 인민전선의 여성전사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를 위해 <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을 불렀다.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게’로 알려진 이 노래는 “투쟁에서 함께 삶에서 함께 그리고 죽음에서 함께” 하자며 “마치 물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우리는 흔들리지 않겠노라” 노래한다. 이 노래 때문에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물러난 뒤에 스페인 내란 당시의 ‘가난한 자들의 군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며 환호했다. 바에즈는 성당에 방문해 무릎을 꿇고 파시스트 군대에게 학살당한 게르니카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을 위해 기도했다.

 

밥 딜런과 존 바에즈

 


밥 딜런과 존 바에즈

인권가수로서 존 바에즈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밥 딜런이었다. 1941년생 동갑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1961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초기에 처음 만나 연인이 되었다. 무명작곡가였던 딜런을 자기 무대에 세워준 사람이 존 바에즈였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과 <우린 흔들리지 않으리>,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House of rising sun) 등 자신의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다.

두 사람은 1960년대 인권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의 기수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무렵에 열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친 뒤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딜런은 비틀즈 음악에 매료되어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나간다. 이후 딜런의 노래에서는 ‘우리’가 사라지고 ‘나’가 주로 등장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1971년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고, 북아일랜드와 아르헨티나, 레바논 등지에서 전쟁과 독재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가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존 바에즈는 1993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관객들을 보면서, 방탄조끼를 입으며 눈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불렀다. 2011년 11월에는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월가를 점령하라’(OWS) 시위를 지지했다.

 

▲"Honor the dead, fight like hell for the living" Joan Baez appears in solidarity with the Occupy Wall Street Movement singing "Salt of the Earth"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지 10년이 된 1975년에 딜런을 추억하듯이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Diamonds and rust)를 작사 작곡해서 불렀다. 가사에서 “당신이 내게 말하네요/이젠 지난날 그리워 않는다고/다른 말로 해봐요/언제나 모호하게 말하는 당신/당신의 모호함이 내겐 너무 분명하네요/그래요 난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이미 지나간 행복과 상처가 내게 다시 온다 하더라도.”라고 읊조린다.

존 바에즈에 대한 평가는 성녀와 창녀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녀는 늘 청바지 차림이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할머니나 입을만한 가운이나 원피스 차림이었다. 콘서트와 많은 앨범수입이 있었지만 대부분을 기부했으며, 어떤 기자가 “존 바에즈는 고뇌하는 지식인을 위해 노래한다”고 기사에 쓰자 “하지만 나는 지식인이 아닌 걸”하고 말했다. 그녀는 노래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었다.

반항적이고 맨발의 비주류파 여성 존 바에즈. 그녀는 그래미상 후보에 여섯 차례 올라가고, 2007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대학 두 곳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두 개 주에 ‘존 바에즈의 날’을 지정받았다. 그녀는 국제인권기구 ‘후마니타스’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기인 노래하는 목소리와 그것을 사용하고픈 욕망”을 가진 저항적 포크 가수이다.

[출처] <가톨릭평론> 2019년 1-2월호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종이신문을 구독 신청하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Dillon 2019-03-04 02:50:19
KOREAN WAR라는 두 단어가 들어 있는 존 바에즈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무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