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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슬픈 선언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짐 윌리스] 교회를 다시 세우기-5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학교의 거의 모든 복음선교 그룹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선교 작업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반응은 이랬다,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라볼 때에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대답한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

이제 나는 그러한 대답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슬픈 선언임을 믿는다. 그런 말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떼내어 주춧대에 놓는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제시하지 않는 추상이 되어버린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복음의 가장 기본인 육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이 그들에게 예수가 누구이고 그분은 무엇에 관심을 두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기

마태오 복음 25장은 하느님의 아들이 특별히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실제로 그들 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메시지이다.

제자들은 그분에게 묻는다, “주님, 언제 저희가 당신이 굶주리고 목마르며, 집이 없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것을 보았습니까” 그분은 대답한다, “너희들이 이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창조주이며 지상의 판관인 분은 비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그분의 몫을 나누므로, 그들을 섬기는 것은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그들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며 괴롭히는 일은 그분을 무시하고 방치하며 괴롭히는 일이다.

마태오 25장의 구절은 세상 문학의 어떤 구절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더 본질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하느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분은 부유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한 계층으로 대하며 특별한 관심과 연민을 보인다. 하느님은 개인들로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를 사랑한다. 그러나 성서는 한 계층으로서의 부자들을 반대하고 가난한 이들 편을 든다.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압받는 사람들, 외국 사람들, 낯선 사람들, 고아들, 그리고 과부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무방어, 무기력함이다. 이 사람들은 권력이 없으며, 시민권을 빼앗기고, 목소리가 없는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구조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고, 희생자들이요 소모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가치를 세워주었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은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들의 권리와 필요가 교회의 정치적 입장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어야 한다.

만일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자리를 그 질문에 대답으로 내놓았는지 이미 알려져 있다.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라면, 그분과 똑같은 자리를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분이 이미 당신 몫이라고 차지한 자리로 가서 그분께 합류해야 한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만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적인 안녕과 주님과 맺는 관계도 모두 위험에 처해 있다.

평화조성 하기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그분을 그리고 서로를 화해시켰다. 그러한 작업에서 하느님은 새로운 백성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친구들이 포함되지만(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의 적인 사람들(계층, 인종, 성, 혹은 국가에 의해 우리와 갈라진 사람들)도 포함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화해를 확장시키는 것이 평화조성을 구성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적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폭력과 부딪치기보다 폭력에 의해 고통을 겪는 그분의 모범을 따르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고통을 겪음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를 제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작업 주위에 벽을 세우는 일이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그룹 안에 가두는 것이다. 인종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혹은 경제적 문제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학적인 위반이다.

전쟁은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하로 봄으로써 그들을 “적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고 죽이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들 각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돌려놓음으로써 우리 적들의 가치를 세워놓았다. 핵전쟁에서 수백만 명을 말살하려는 의도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부정이다.

대가없는 화해는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평화조성가들은 긴장과 갈등이 최고로 고조되는 자리에 머물 필요가 있다. 평화주의는 사람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들을 강조하는 수동적 입장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들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평화조성의 소명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며, 화해의 직분은 자주 우리들을 오해받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핵 시대의 폭력을 오직 우리들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면할 수 있다.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무장해제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뿐이다(콜로 2,15).

평화조성가로 불림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 평화 안에 살라는 초대다. 그러한 나눔의 삶은 건강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 나눔의 삶이 우리를 평화의 길로 가도록 양성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가? 그런 삶이 물질재화와 안전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가?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동료애는 우리의 증오, 두려움, 이기심, 권력에 대한 욕망을 치유하는가? 지역교회에 대한 체험이 전쟁의 전체 체제를 받쳐주는 이러한 것들을 뽑아내 주는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있는 두려움, 미움, 그리고 폭력과 마주치게 해준다. 공동체는 또한 우리 주위에 있는 이런 똑같은 것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으며 우리가 함께 하는 삶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들을 세상에 확장시키도록 가르쳐줄 수 있다.

교회 삶에 있어 당면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복종이라는 주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삶과 직분의 계속이라고 이해하는가? 그리스도의 화해하는 작업과 우리의 화해 행위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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