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돈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 드러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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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돈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 드러나야
  • 짐 윌리스
  • 승인 2018.10.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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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윌리스] 교회를 다시 세우기-4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관하여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기 교회 구성원들이 그들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분이 올 때까지 “잠정적인 윤리”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물질적, 경제적 나눔은 임시방식이고 보통의 방법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묵시론적 기대를 한 것이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정상적이고 보다 전통적인 경제방식이 제도화되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눔이 경제적 위기, 긴급 상황에 대한 응답이었으므로, 다른 상황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기록된 나눔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경제문제에 관하여 이해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해 시도했다고 믿는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은 단순하게 성령이 그들의 삶에 들어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묘사한 것이다. 성령의 도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핵심적인 관계는 성령의 오심과 새로운 경제창조, 새로운 가족, 그리고 새로운 공동생활 사이의 관계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현실로 만들었고, 이런 그들의 결정은 성령의 오심으로 가동되었다. 그러한 양식의 나눔이 처음 3세기 동안 수없이 발생하였다는 증거가 있고, 경제적 나눔은 그후 쇄신운동의 일부가 되어왔다.

 

사진출처=pixabay.com

코린토 2서 8장에서, 바오로는 영적인 일치와 경제적 평등 사이의 활기 넘치는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나누는 것을 단지 준비하라고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초대되었다. 형제자매들이 가난 속에 있는데도 재물을 쌓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죄의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회중들은 다양한 자리에서 왜 그러한 다른 경제적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가졌을 때 가난해져야 하는가? 우리는 가족이 아닌가?

돈은 깊은 영적인 문제다. 돈은 세속적이지도 않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며 신앙을 시험하는 주제다. 돈과 소유물에 관한 이야기는 성서에 넘치고 있고 우리를 압도한다. 분명히, 성서의 하느님은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또한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이 문장은 우리가 그 반대를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인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말이 우리의 결단을 보여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진정한 가치들과 우선순위들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돈을 쓰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는 점을 예수님은 고수한다. 우리의 실제적 결단, 투신은 우리의 경제적 선택에서 드러난다.

성서는 돈과 소유물의 축적을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방해하는 큰 영적 위험으로 보고 있다. 하느님인가 맘몬인가의 영적 선택이다. 이 둘은 우리의 삶에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둘을 다 섬길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동시에 하느님과 맘몬을 섬기려고 시도한다. 그러니 그 시도는 우상숭배다. 재물의 맹목적인 소유는 돈을 섬기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부유해지지 않는다. 오직 돈의 축적에만 집중할 때에 부자가 된다. 성서는 이것을 “노예살이”, 굴레의 관계라고 부르고, 축적을 노예살이와 동일시한다.

성서는 또한 돈의 축적을 불의라고 본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는 재물을 쌓음으로써 희생된다. 가난한 세계 안의 경제적 잉여는 죄악이다. 부유한 교회는 전혀 주님에 대한 의탁을 증언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축적의 굴레에 묶여 있을 때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삶, 활기, 성실함을 경제적 나눔과 단출함이 가져다 준다. 

 

사진출처=pixabay.com

교회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는 경제적으로 나누는 것, 우리의 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어떤 필요가 표현될 때에 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우리 존재의 모든 것, 가진 것 모두를 주게 될 것이다. 경제적 나눔은 전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고 단지 성직자, 수도자들 혹은 특별한 직분 그룹만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을 위한 삶의 방식이다.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교회는 경제에 관한 새로운 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정한 경제적 형태나 구조가 규범이 될 수 없고, 다만 어떤 행정적 수단들을 선택한다 해도 그것이 나눔을 적게 한다든가, 보다 고급의 경제적 차원에서 살기 위한 자유를 취하는 것,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거나 보다 독립적으로 사는 기회가 될 수 없다. 성서의 원칙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공동경제 생활이다.

현재 우리의 경제적 위기의 심각성은 초기 교회의 경험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많아지고 자원은 적어진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폭력과 갈등, 대립의 가능성은 증가한다. 미래의 전쟁들은 거의 확실하게 경제적 불균형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평화조성가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돈과 소유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성서의 자료들, 초기 교회의 증언,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상황 이 모두는 돈과 소유물과 우리의 관계의 변화가 교회의 쇄신을 이끌어내는 중대한 시험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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