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체제에 순응하길 거부하는 이들의 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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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체제에 순응하길 거부하는 이들의 근거지
  • 짐 윌리스
  • 승인 2018.10.2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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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윌리스] 교회를 다시 세우기-3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출발하기까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신도들을 공동체로 이끈다. 새로운 질서는 나눔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실제가 되어간다. 사도행전과 서간에서, 교회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성령강림 때에 부여되는 성령은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도록 하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회심을 일으키며,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복음은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켰다. 기쁜 소식은 인종, 계급, 성, 국적, 두려움, 증오, 그리고 불신 때문에 갈라졌던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전파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자 한다. 교회 그 자체가 이 기쁜 소식의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분은 당신이 우리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분은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공동체의 가장 간결한 정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확장된 삶을 살게 되었으니 그 똑같은 삶을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확장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대로 준다 –똑같은 사랑을, 똑같은 용서를, 똑같은 평화를.

 

사진출처=pixabay.com

어떤 전통에서 출발했든지 간에, 공동체에 대한 체험은 성찬례의 기념이 중심인 곳에 동료애를 생겨나게 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성찬례가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준 것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유일한 권위가 우리들 사이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현존임을 상기시켜 준다.

교회가 우리 시대의 가치관, 정신, 그리고 구조에 순응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공동생활이 분열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뿌리가 없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굴복하여 왔다. 우리는 쉬운 먹잇감이다.

오늘날 곳곳의 많은 교회들은 심각하고 잔인한 박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적은 박해가 아니다. 적은 유혹이다. 우리는 박해받는 백성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있는 백성이다.

나는 지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을 해오고 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현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생존하는 데 있어 가장 의존하고 있다는 느끼는 자리는 어느 곳이며, 그룹들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그들의 지역 교회, 신앙공동체를 지적하여 대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신 그들은 직장이나 기타 다른 경제, 교육 혹은 정치기관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보통 경제적 생계, 개인적 발전, 혹은 사회적 영향과 대부분 관련 있는 단체들이다.

만일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지역 신앙공동체보다 이 세계의 권세와 권력에 더 뿌리를 두고 있다면, 교회가 어려움에 봉착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분명하게, 우리가 가장 뿌리를 박고 있는 사회적 현실은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우선순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대부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안전이 다른 곳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적 동료애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백성들의 안전이 최종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기관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우리들은 그것들에 계속 순응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가진 것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한다(루카 14,33).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엄혹한 말씀들” 중의 하나다. 이 말씀들은 우리 인간이 자연적으로 기울고 이 사회가 너무나 강력하게 강화시켜 주는 안주와 안락함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도전을 주고 있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에 있는가? 물건들에? 돈에? 사람들에? 역할에?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우리의 관계들에? 지위에? 신체적 편안함과 보호에? 다른 이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에? 다른 이들과의 친밀함에?

우리는 우리의 안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안전장치들이 우리를 반대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전책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지배하며, 우리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가는 식으로 이용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참으로 응답하기 시작하고 불안전한 자리로 멀리 나아가려고 하면, 그럴수록 이 세계의 권력도 더 뻗어나가 우리를 붙잡아 매고, 다시 지배의 울타리 안에 끌어다 놓으려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실제적 변화는 희생 없이 결코 오지 않는다. 대가없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 개인차원이나 공동차원, 그리고 정치적 차원을 볼 때 모두가 사실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지불한 값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나는 변화의 값, 치유, 정의, 평화의 대가가 이 나라(미국)와 세계에서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그 대가를 짊어지는 자유를 누가 가질 것인가이다.

복음화는 더 이상 단순하게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회개의 과정을 거치게 하고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어 막연하게 그들이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회개, 회심은 사람들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가능한 환경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내적으로 강하고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우리를 강화시켜주는 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는 우리 삶의 치유가 국가들의 치유를 위한 근간이 되게 하는 자리다. 공동체 만들기는 결국 체제에 저항하고 살아가기에 더 낫고 보다 더 인간적인 길들을 위한 적절하고도 영적인 기반을 마련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안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세상 앞에 서는 것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권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세상의 보상과 징벌들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래서 세상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것보다 체제에 더 큰 위협은 없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내놓는 것에서 오는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은 없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공동체로 알려진 공동체들이 지금은 그 핵심에 예배를 배치하는 자리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강력한 예배의 공동체로 알려진 곳이 정치적으로 변화하는 현상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변화들은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와 정치는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한 모든 요소를 갖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깊은 의미에서 볼 때 모두 똑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즉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우리에게 하느님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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