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용서하면서 용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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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용서하면서 용서받는다
  • 레오나르도 보프
  • 승인 2018.10.1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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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예수님의 메시지들 중에 가장 놀랍고 수치스럽기조차 한 메시지의 하나는 하느님이 무조건의 사랑과 무한한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선포다. 하느님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도 주는 분이다. 그분은 심지어 “감사하지 않고 사악한”(루카 6,35) 사람들도 사랑한다.

이러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 당대의 열심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오늘날 계명에 복종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느님은 불경한 사람들, 죄인들, 착취자들, 그리고 사악한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혁명적인 메시지가 갖고 있는 역설이다. 즉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탕자 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뛰어나가고 구원된 99명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더 기뻐한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라고 말씀한다. 그런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용서와 자비에 관한 예수님의 모든 비유들은 당대 열심한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겨냥하고 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들(루카 18,9-14) 그리고 돌아온 아들(루카 15,11-32)의 비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충실하고 선한 것 이외에, 또한 자비로워야 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마태 18,22), 한계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가 자비로운 것처럼 자비롭기를”(루카 6,36) 추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유보 없이 용서한다면,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 복음은 단호하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이것은 하느님과 무슨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 구절은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를 이해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빚을 진 하인은 자기가 빚진 수천의 데나리를 완전히 탕감 받았으나, 극히 적은 금액을 자기에게 빚지고 있는 동료 하인의 빚은 탕감해주지 않았다. 주인이 그를 불러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비유의 교훈은 수정처럼 투명하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 3,13)

이런 태도는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의 정의감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쉽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난 용서하기보다 내가 죽는 게 나아.”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용서받는 경험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 내가 아무런 유보없이 그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애덕의 행위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자비를 행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최고의 재판관을 이렇게 선언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실존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로 애쓰는 것이고, 회한과 복수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것이고, 해를 끼친 사람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은 단순하게 잘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공유하는 형제자매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하게 “가해자들”과 “죄인들”로 축소될 수 없다.

용서하는 것은 그들이 저질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에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한 편이 폐쇄적이고 여백이 사라졌어도 일치의 결속을 지지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시 한번 사랑이 흐르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긍정적인 편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서를 통하여 친족처럼 삶을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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