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 용감한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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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 용감한 전쟁은 없다
  • 박동호 신부
  • 승인 2018.07.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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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2

용감한 전쟁은 없다

교회는 줄곧 평화 문제를 거론합니다. 전쟁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지 단죄합니다.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이 용감무쌍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6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6천만 명 가운데 4천만 명은 민간인이었고, 그 가운데 80퍼센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며 노인이었습니다. 이런 데 어떻게 용감한 전쟁입니까?

전쟁은 속성상 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처음엔 들판에서 주먹으로 다투고, 막대기를 사용하다가 창을 만들어 냈습니다. 점점 멀리서 상대방을 죽이려고 활과 총을 만들어냈고,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살고 상대만 죽이기 위해서지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주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지하 벙커에 들어가 폭격 단추 누르고 퇴근을 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여기엔 양심도 공포도 없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더 실증적으로 전쟁이 용감하지 않다는 증거는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6천만 명 중 6백만 명은 유대인이었고, 이들은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이 6백만 명이나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그나마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 얼마나 죽었는지 모릅니다. 나치는 보육원과 양로원, 정신병원 수용자들을 거의 다 죽였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가족들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어떻게 용감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 독일만 이런 행위를 했을까요?

지금에 비하면 파괴력이 20분의 일도 되지 않는 핵무기 두 발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70년 전에 21만 명이 죽었습니다. 미군이 히로시마에 처음 떨어뜨린 핵폭탄은 우라늄으로 만든 것이고,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것은 플루토늄으로 만든 것입니다. 더 강력한 폭탄인 셈이죠. 그런데 히로시마에서 14만명이 죽었고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조종사가 비행기 안에서 버튼을 눌러 투하를 시켰는데, 첫 번 것은 히로시마 상공에서 떨어뜨려 10,000~15,000 정도의 온도로 사람들을 태워 죽였기 때문이고, 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플루토늄이 떨어진 나가사키에서는 폭탄이 언덕너머에서 터졌기 때문입니다. 이 핵폭탄은 핵발전소처럼 실수나 고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직접 목적의식적으로 투하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죽은 이들은 군인이었을까요? 그곳은 병참기지였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교회가 해야 하나요? 힘센 자들은 벙커 안에서 살아나겠지만 무고한 시민들은 고스란히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는 경제 이야기를 했고 지금은 평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교회가 하는 이유는 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위한 구원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부른 자 옆에 굶주리는 나자로가 있는 현실은 구원의 상황이 아닙니다. 핵무기 공포로 사람들이 떨고 있는 상황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하느님의 뜻이 아직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교회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

사회교리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회 문화적 계획에 대해서 고발하고 제안하고 투신한다.”고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을 하느님과 결합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을 하느님과 결합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에 의해서 세상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는 사회 문화적 상황을 만들기 위해 고발하고, 제안하고 투신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소유가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부당한 현실입니다. 이런 사회는 특별히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에너지 문제도 그렇습니다. 도시민들의 윤택하고 편리한 삶을 위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곳은 가능한 도심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곳은 정치경제적으로 힘없는 거주민들이 사는 곳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핵발전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도심까지 송전로를 통해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송전탑을 세우는 동안에, 그 송전탑이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농민들의 땅은 헐값이 됩니다. 이들이 아무리 저항해도 ‘국책사업’이라고 해서 경로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도심에서는, 성남시 분당구처럼 3천억 원을 들여서 이 도시를 지나가는 고압 송전선을 지하에 매설하고 축제를 벌이는 동안, 농촌에서는 송전탑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권력이든 돈이든 기회든 한 쪽에 쏠려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이럴 때 교회는 당연히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저항해야 합니다. 왜?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힘센 사람이나 무력한 사람이나, 도시민이나 농민이나 모두 하느님이 사랑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야 하는 게 교회입니다.

복음정신은 사회정치적 사랑

교회는 현세 사물의 질서 안에 복음정신을 스며들게 하자고 말합니다. 여기서 복음정신이란 진리, 자유, 정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사랑은 ‘사회 정치 차원의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늘어져 있는데 사제와 레위는 길 반대편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다가갑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다가가게 합니다. 그 마음 때문에 그는 자기 포도주와 자기 기름을 써서 상처를 동여매 줍니다. 그리고 자기 나귀에 태우고 이 사람을 여관 주인에게 맡기며 자기 돈을 씁니다.

올해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난민들과 이민자 문제를 거론했어요. 첫째, 환대하라. 둘째, 보호하라. 셋째, 증진시키라. 넷째, 결합시켜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보호한 다음에 그를 일으켜 세워서 구성원으로 동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으로 내몰지 말라는 거지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도 그런 뜻인 거죠. 이런 사랑이 사회정치적 사랑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다음날 그 사람이 또 강도를 만났는데, 이번엔 그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는 이제 죽어야 하는가, 하고 킹 목사는 묻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은 흑인들이 강도짓만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강도짓을 했을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천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고, 굶주린 나머지 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굶주렸나? 일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일자리가 없었나?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배우지 못했나? 흑인이어서 교육에 차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국의 인권운동가들은 흑인 아프로-아메리칸들이 대학에 진학을 할 때 강제 할당을 받아서 대학에 진학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주립대학 같은 경우엔 학비도 저렴합니다. 흑인들이 공부를 해서 일자리를 얻게 되면 그만큼 강도짓을 할 확률이 떨어지고, 강도 당할 확률도 떨어지고, 죽는 사람이 생길 확률도 떨어지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던졌던 관점, 개인 차원의 사랑 말고 사회 차원으로 불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 이런 것을 사회교리에서는 ‘사회적 중개’라고 합니다. 사회 차원의 제도나 법을 바꾸어 곤궁한 사람이 곤궁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곤궁한 처지에 몰리더라도 보호해주고, 일으켜 세우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제도를 만드는데 목소리를 내고 힘을 합하고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들을 내세우면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보장제도입니다. 지금은 어찌 보면, 시민사회 안에서 국가가 교회보다 더 압도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배고프고 가난하고 목마르고 떠돌아다니고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누가 더 많이 돌봅니까? 교회입니까? 사회입니까. 사회입니다. 결국 국가가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그 일을 하도록 국가에 권한을 위임하면서 재원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어줍니다. 교회, 역시 정치에 압력에 가해서 약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관점을 우리는 사회정치 차원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제도나 법을 잘 만들면, 현세 사물 질서에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이라는 가치가 세상에 스며듭니다. 이처럼 제도나 법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그 공기 안에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이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문화, 경제, 정치, 국제사회, 자연 이런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교리, 인생의 가이드라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대의 징표를 탐구한다’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는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은 인문학적, 사회적 측면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성령이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계신지 잘 보라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당연히 공동선을 지향하며, 자유와 진리를 추구합니다. 둘째로는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란칫흐코 교종(사진출처=pixabay.com)

셋째로는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인데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악한 정신이 길을 잡아서 움직이며 역사의 줄기를 형성하게 되면 이를 되돌리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힘없는 사람과 힘없는 사회, 힘없는 자연부터 말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고발하고, 시대정신을 파악하며,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는데 투신하라고 가르칩니다.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지침입니다. 인생의 가이드라인이며, 신자들은 교회가 안내하는 지침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지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잣대는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그것은 ‘인권’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권은 항상 발전하고 변화하고 퇴보도 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낙태죄 폐지 논란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생명권은 여러 인권 항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인권들의 토대이고 기원이고 바탕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인권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는 이 생명의 권리를 인권의 목록으로 끼어 넣지 않습니다. 범주가 다르다는 거지요. 그래서 생명권은 논란을 가질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적 권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권자가 하느님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생명의 권리가 훼손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전쟁과 인신매매, 고문 등이죠. 그런데 교회는 이런 것을 거론하지 않고 낙태만 강조하는 게 문제입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이 문제는 자기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생명권이 침해받을 때 가장 고통스런 희생자는 당연히 태아이고, 그 다음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세상은 이들에 대해서 별로 한 것이 없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가 여성인데, 그동안 사회와 교회가 그들을 위해 그다지 한 것이 없다는데서 나온 말이 ‘균형점’입니다. 교회는 생명권이 모든 인권의 토대이며, 이 토대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에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여성들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임신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여성에게 짐을 지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을 둘러싼 모든 사회정치적, 경제문화적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합니다. 복음의 빛에 비추어 신문을 읽고, 특별히 억울하고 가난한 삶을 강요받는 약자들을 주목하라고 다그칩니다. 복음화란 기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녹취 풀이 및 정리/ 황진, 한상봉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이문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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