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도 사제 … 그러므로 나도 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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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도 사제 … 그러므로 나도 사제다
  • 유형선
  • 승인 2018.07.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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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민 신부의 <손 내미는 사랑>을 읽고

[유형선 칼럼] 

작은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가족들을 깨울까 조심스레 출근 준비를 하다가 문득 거실에서 창 밖을 보며 서 있는 작은 딸을 보았다.

“수린아, 이 시간에 어떻게 일어났니?”

작은 딸은 나를 보고는 창문 쪽으로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아빠! 피었어요! 피었어요!”

작은딸 손짓에 이끌려 창 밖을 내다보니 목련 가지 끝에 꽃망울이 피어 나고 있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바로 그 시간에 이제 막 피어난 목련 꽃봉오리를 보았다. 잊지 못할 강렬한 체험이었다.

“수린이는 꽃 보려고 일찍 일어난 거야?”
“네! 학교 갈 때마다, 집에 올 때마다, 목련 꽃이 피어나길 기다렸어요! 피었어요! 피었어요!”

<손 내미는 사랑>(이제민, 생활성서사, 2018)

이제민 신부의 새 책 <손 내미는 사랑>(생활성서사, 2018)을 읽다가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두 해 전 작은 딸이 보여준 새벽녘 목련 꽃봉오리가 떠올랐다. 이제민 신부는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마르 1,15) 문장을 재해석하며 ‘지금 여기 손 닿는 곳의 하느님 나라’를 설명한다.

"예수님은 천국이 ‘왔다’고 선포하시는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천국을 ‘가는’ 나라로 생각합니다. "(51쪽)

"인생의 기쁨을 먼 미래에 걸어 놓고 죽은 다음에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천국을 찾는 우리 손은 어디를 향하여 있습니까?"(53쪽)

"때가 찼다. 하느님의 왕국이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마르 1,15 참조) (53쪽)

"우리말 성경은 '때가 찼다'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의 종속문인 것처럼 번역하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서기 0년 12월 25일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시작된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강박적인 사고의 산물로, 예수님을 신화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57쪽)

"하느님의 왕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단어는 우리나라 말로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엥기켄’입니다. 이 단어는 ‘손 안에 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내 손 안에,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하십시오. 밀어내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문장(마르 1,15)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천국을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먼 나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다고 선포하는데, 우리는 천국을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냅니다." (71쪽)

작은 딸이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영 보지 못했을 새벽녘 목련 꽃망울. 거실 창문을 열면 손 닿을 듯 저리도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던 목련 꽃망울의 존재를 알아채는 데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민 신부는 하느님 나라도 손을 뻗어 닿는 곳에 있다고 설명한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쁘게 살리라는 희망을 버리고 손을 뻗어 모든 것에 손이 닿게 하십시오. 그들이 나병환자든, 열병을 앓는 이든, 가난한 이든, 세리든, 창녀든, 율법 학자든, 바리사이든, 이방인이든, 백정이든 가까이 다가오게 하십시오. 손을 내밀고 안수하십시오.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십시오. 거기에 희망을 두십시오."(73쪽)

책 제목이 보여주듯, 하느님 백성은 ‘손 내미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천국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사랑을 전할 때 나 역시 하느님 왕국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주님! ‘우리 손이 닿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진리를 배우고 깨닫고 다 시 망각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저희를 부디 도우소서!

 

사진출처=pixabay.com

부끄러운 한국 천주교회의 오늘

<손 내미는 사랑>의 책 표지 좌측에는 작은 제목으로 ‘사제지만 사제인 줄 모르는 당신에게’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머리글 제목도 ‘모든 이가 사제의 삶으로 부르심 받았다’라고 쓴다. 요컨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사제의 소명을 가졌다는 뜻이다. 평신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라오스(laos)’가 성경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그 안 교회가 성직자를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개념으로 오해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에 포함된다는 것을, 성직자도 하느님 백성의 원”(113쪽)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고 적는다.

한국천주교회를 돌아본다. 나의 부모님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었고, 나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었고, 내 아내와 두 딸에게 하느님을 알려준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비치는가 돌아본다. 이내 마음 저편으로 씁쓸한 바람이 인다. 씁쓸한 바람이라도 온 하늘을 뒤덮도록 강하게 불어 꽉 막힌 곳을 뚫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어난다. 쓴웃음도 올라온다.

예수 안 믿는다고 누가 욕하지 않는 사회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더라”는 소리도 들린다. 세상 온갖 더러운 일 했다고 텔레비전 나오는 사람 중에서 예수 믿는다고 자랑하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래도 이런 예수쟁이 욕을 들으면, 개신교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한 귀로 흘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천주교회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얼굴 화끈거리는 일 투성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천주교회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사회 전체가 자본과 권력 앞에 숨죽이던 그때 그 시절, 여러 천주교 사제가 민중과 함께 싸웠고, 여러 성당이 민주화의 성지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 그 시절의 일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은밀하고도 조직적으로 권력과 양다리를 걸친 상태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릴 것 없이 교회와 권력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였다.

한국천주교회가 권력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발걸음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도 여전히 강력했다. 두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천주교 최고 수장들은 정부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국 천주교 최고 의결 기구인 주교회의마저도 4대강 사업 반대 의견을 표명할 만큼 4대강 사업 의 악취가 만천하에 퍼져갈 때, 한국천주교회를 상징하는 추기경은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또 다른 한 명의 추기경은 ‘유족도 양보하라’는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던졌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천주교 수장의 발언 역시 잊지 못한다.

어디 정권에만 구원투수였던가?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도운 신부들에게 한국천주교회는 보복성 인사 조처를 내렸다. 노동자들 앞으로 사설 용역 깡패를 부르는 경영자 신부도 있었다. 미투운동이 가장 강력하게 불붙은 곳도 한국천주교회였다. 모 교구는 ‘악마가 교회를 접수했다’ 는 소리도 요즘 들린다. 한 줄 한 줄 나열하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한국천주교회의 민얼굴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한국천주교회를 바로 세워야 할 평신도의 보편사제직

한국천주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알려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두겁 뒤집어쓴 짐승’ 소리만 듣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이런 글이 불편한 분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고위 성직자 몇 사람의 행동이 전체 한국천주교회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없지 않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다시 묻고 싶다. 고위 성직자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평신도들은 대체 무엇을 했던가? 평신도는 교회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한국천주교회가 저지른 어두운 역사의 순간에 평신도는 어디에 서 있었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옆이었던가? 아니면 물로 손을 씻던 빌라도 옆이었던가? 예수를 고발하던 대사제와 원로들 옆이었던가? 아니면 도망치는 베드로 옆이었던가?

촛불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다 함께 들어 올린 촛불은 ‘반생명·반정의·반평화·반민주’의 권력을 기어코 무너뜨렸다. 권력이 부패해도 국민이 깨어 있으면 얼마든지 나라는 구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일부 고위 성직자가 권력과 금전에 눈멀었더라도 평신도가 깨어 있다면 교회는 제 길을 찾을 수 있다.

평신도가 눈뜨지 못하고 그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평신도 무능력화 현상은 성직자 중심주의와 늘 함께한다. 모든 것을 성직자가 결정하는 데로 움직이는 교회. 하나에서 열까지 성직자가 결정했을 때, 그제야 움직일 수 있고 움직여 온 교회. 성직자 중심주의와 평신도의 무기력화가 함께 공존하는 교회는 생명력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잿빛 조직으로 정체한다.

최근 평신도들이 자생적으로 스스로 깨어나 성직자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한국천주교회의 현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시시각각 성찰하는 반가운 움직임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가톨릭 프레스》, 《가톨릭일꾼》, 《가톨릭평론》 등 평신도 중심의 독립언론들이 주인공들이다. ‘성직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군대 같은 조직이 곧 평신도 조직’이라는 거대한 관성이 과거와 달리 그나마 조금이라도 깨어졌다면, 평신도 중심의 가톨릭 독립언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20대 시절, 이제민 신부의 <교회―순결한 창녀>(분도출판사, 1995)를 읽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가톨릭학생회를 통해 명동성당을 드나들며 만났던 성직자는 시대의 흐름과 민중들의 바람 앞에서도 결코 권위주의를 내려놓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중에 만난 <교회―순결한 창녀>는 참으로 혁명적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은이가 성직자였다! 성직자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평신도와 성직자가 모두 하느님 백성이라는 메시지가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며 또한 복음의 정신이라는 메시지는 무더위 속에 마주친 한줄기 소나기 같았다.

이제민 신부의 새 책 <손 내미는 사랑>을 읽는다. 벌써 20여 년이 흘러 이제민 신부는 일흔이 되었고 나는 40대 중반의 가장이 되었다. 두 딸과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다녔던 그 겨울, 자녀에게 부끄러운 아버지로 살지 않겠다고 깊이 다짐했다. 이제민 신부의 새 책을 읽으며 또 하나의 다짐을 추가한다. 평신도도 사제다. 그러므로 나도 사제다.

[출처] <가톨릭평론 2018년 5•6월호>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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