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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 농성 해산의 막전막후

명동성당에서의 6일간의 농성이라는 초유의 사건에는 숨은 이야기들도 많다. 명동성당 농성 이튿날인 11일부터 농성장에 각 정파가 들어오기 시작해서, 13일에는 장안의 모든 정파가 농성장으로 하나씩 다 들어왔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농성장에 조직원들을 들여보냈다. 그들은 대표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한때 민통련은 농성장에서 주도권이 없어져 버렸다. 농성하는 대중의 의결권이 현장을 움직였다. 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이명식, 김부겸 등이 들어왔지만, 발언은 하더라도 주도권을 갖지는 못했다. 그들은 또한 농성장 안팎으로 오가며 명동성당과 민통련을 잇는 메신저로서 의견을 조율하며 민통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농성 내내 수행하였다.

하여간 각 정파가 모이게 되면서 의사 결정이 통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농성장의 생활상의 문제와 내부의 의사결정 등의 문제가 생기면서 내부 동력이 점차 소진되어 갔다. 명청의 지도부는 이때부터 농성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 할 것인가에 대해 성당 측과 조정 겸 협의를 했다. 서울교구에서는 함세웅 신부, 명동성당에서는 청년회 지도신부이며 명동성당 보좌신부인 양권식 신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6월 13일이 되어 농성이 나흘째를 맞으니 내부의 기강은 더 나빠졌다. 명확하게 물증을 잡지는 못했지만, 안기부에서 내부에 있던 몇몇 프락치들에게 오더를 준 듯 했다. 농성장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밥을 먹다가 갑자기 던지고,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보고 하는 문란한 행동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회의를 하면 늘 강경투쟁을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내부 교란 공작이었다. 거기에 더해 체력적으로 지치면서 농성시위대에게서도 긴장감을 잃은 행동들이 나타났다. 천주교 쪽 인사들에게 농성을 서서히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14일에는 민통련에서도 농성 관련 회의가 있었다. 정부 쪽 태도는 12일까지는 강경했다가 13일부터 꺾기기 시작했다. 명동성당 농성에서 가장 힘 있는 대표가 서울지역대학생연합회 쪽에서 파견된 학생들이었다. 농성 집행부가 열다섯 정도 되었는데, 그 중 몇 명이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제시하고 농성을 계속하자고 결정을 하였다. 무사 귀환, 농성시위대 연행자 불구속, 연행자 전원 석방 세 가지 요구였다. 무리가 있었지만, 함세웅 신부는 이 조건을 받았다. 그리고 안기부 차장과의 대화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농성시위대 입장이 난처해졌다. 농성은 이제 해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격론이 벌어졌다. 해산을 주장하는 자들의 요지는 비폭력 평화시위라는 6·10대회 주장과 원칙이 시민들의 호응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 대중적 열기를 점점 확산할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국본과 다음 싸움을 함께 전개하자는 것 등이었다. 반대로 농성 계속을 주장하는 자들의 요지는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싸움이지만 계속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 투쟁의 열기를 식게 할 수 있다는 점 등이었다. 명동이 구심점이고 해산 이후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지 아무 것도 준비 안 된 상황이므로, 끝까지 농성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 논리였다.

 

천주교 쪽의 내부에서도 이견들은 있었지만, 명청 회장인 기춘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농성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들은 민통련의 이명식, 김부겸 등과 함께 협의를 진행했다. 이 두 사람은 사전 민통련 회의에서 현장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기에 해산 결정에 크게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농성시위대에서 해산과 관련한 투표를 했는데 첫 투표는 의결정족수 미달이 되었다. 투표 결과를 칠판에 써놓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놓기도 했다. 2차 투표에서는 찬성 112표, 반대 104표가 나왔다. 하지만 2차 투표에 대한 절차와 방법상의 문제제기가 있어 3차 투표를 실시하였다. 찬성 119표, 반대 94표로 해산이 결정되었다.

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함세웅 신부 등이 해산을 간곡히 설득하기도 했다. 투표로 해산이 가결되고 나서 김수환 추기경도 농성시위대에 와서 인사 말씀을 했다. 15일 12시 농성시위대들은 명동성당에서 마련한 버스에 올라 성당을 떠났다.

명동성당 농성이 그 의의는 극대화하면서 아무런 피해 없이 마무리 된 데는 누구보다도 함세웅 신부의 역할이 컸다. 농성시위대들을 경찰로부터 지켜내고 또 보살피는 데 가장 열심이었고, 김수환 추기경과 농성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정권 측과 협상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지쳐가는 농성자들을 고려하여 농성을 평화롭게 마무리하고, 명동성당 농성이 이후 6·18최루탄추방대회와 6·26국민평화대행진의 징검다리가 되도록 하는 과정에서 함세웅 신부는 최선을 다했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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