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 농성과 명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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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 농성과 명청
  • 이명준
  • 승인 2018.04.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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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은 명동성당 농성투쟁 과정에서도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명동성당 농성은 시작된 이래 농성시위대들과 교회, 국본 그리고 정권 측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맡았던 전국사제단과 천사협의 지휘 아래 명청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안정화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사제단의 지시로 명동성당 양권식 보좌신부실에 상황실을 설치한 뒤, 명청이 책임을 맡아 농성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12일부터 격렬한 공방전이 소강 국면으로 전환되자, 명청은 대대적인 청소를 시작하였다. 상계동 철거민 농성 주민들과 시위대들도 합세해 어지럽게 널린 최루탄과 화염병, 돌 등의 잔해들을 치웠다.

아울러 경찰과의 격렬한 공방에서 다친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응급처치조를 구성하여 부상자들을 긴급 구조하였다. 농성자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자, 시위대의 건강을 염려하여 명청은 성당 측을 설득하여 숙소로 문화관을 개방하도록 하였다.

 

농성투쟁이 비폭력 평화시위로 전환하는 데도 명청 회원들과 천주교계 사회운동 인사들의 설득이 주효하였다. 명동성당 농성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전 국민의 투쟁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투쟁을 지지, 보호하고, 농성시위대들은 교회와 시민들의 입장에서 비폭력 평화투쟁을 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경 투쟁 방법의 전술적 선회를 전제로 천주교계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합의에 기초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성당 주변을 빼곡히 둘러쳤던 방어용 바리케이드를 전격적으로 철수하였다.

농성시위대 체계화에도 명청은 역할을 하였다. 농성시위대는 물품부, 의료반(응급처치조), 투쟁부, 경비조, 선전팀 등으로 재구성하여, 투쟁부와 경비조에는 노점상, 배달원, 일용직 노동자들을 배치하였고, 선전팀은 명청과 함께 성당 입구 안내실의 대민 방송용 마이크를 사용해 시민을 상대로 한 방송에 주력하도록 했다. 상계동 73세대 천막 농성 주민들의 헌신적인 역할도 있었다. 천막 농성장 안에 있는 모든 솥을 동원하여 밥과 라면을 끓여 시위대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또한 옷을 빨아주고, 부상자들을 간호해 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한 신자들과 시민들이 농성시위대에 대한 시각을 점차 달리 하게 되면서, 단순한 지지와 성원의 차원을 넘어 농성투쟁의 현장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격렬한 공방전과 이틀간의 농성투쟁 와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농성시위대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12일 점심시간 때 일어났다.

명동성당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던 계성여고 학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걷어 농성시위자들에게 전해온 것이다. 농성시위자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고, 도시락을 먹고 나서 깨끗이 씻어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수위실에 갖다 놓았다. 여고생들은 다시 도시락과 함께 사연을 보내왔다. “언니, 오빠들에게 보냅니다. 많은 도움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도시락에 든 쪽지를 받고 여러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꼭 보고 싶은 언니, 오빠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웃으며 보고 싶습니다. 안녕-동생들이 보냅니다.” 농성시위대 모두의 가슴은 한없이 뜨거워졌다.

점심시간이 되면 성당으로 와 휴식을 취하던 주변 사무실, 상가 사람들이 성당 입구 쪽으로 나와 주변에 미리 와있던 시민들과 자연스럽게 호응하여 시국토론회를 개최한 뒤, 거리평화행진을 시작하였다. 행진이 끝난 뒤 수녀들은 성당 언덕길에 앉아 기도를 하고 성가를 부르며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때부터 명동 주변의 사무실 직원들과 상가 상인, 남대문시장 상인 그리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물품과 성금으로 대대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성당 안에서는 좌판을 마련하여 김밥과 주먹밥, 떡, 음료수, 커피와 차, 우유, 과자 등을 시위대뿐만 아니라 상계동 주민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상시적으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의류나 생활필수품, 생리대 등등까지도 아무 부족함이 없이 제공되었다. 더구나 오후 1시경에는 명동성당 수녀들이 점심 김밥을 손수 만들어 농성시위대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명청은 6월 10일부터 15일 해산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명동성당에 모으고 민주쟁취의 열망과 의지를 결집시켰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서 숨은 조력자였다. 특별히 6월항쟁 직전까지 명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던 김수창신부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명청 활동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교회 내외부의 외압을 최선을 다해서 막아주며 명청과 명동성당을 지켜준 진정한 ‘우리들의 신부님’이었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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