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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도스토예프스키, 혁명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6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만 본다면 돈과 치정과 살인에 관한 통속적인 소설이지만, 그 통속적 사건 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심오한 종교적 성찰을 담아 놓았다.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청년기에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죽음의 집에 관한 기록>에서 소설로 썼는데, 그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본능의 지배를 받는 죄인들이다. 이를 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는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죽음의 집’(dead house)라고 부른다. 사람이란 동물적 욕구가 없을 수 없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나 양심, 성찰이 없이 본능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은 어디나 ‘지옥’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의 증오를 경험하면서,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옥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중에 유일하게 자기 본성과 반대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일부

양파 한 뿌리의 선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7권 3장에선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석영중 교수는 이 이야기를 <EBS 특별기획-통찰>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옛날 옛날에 사악한 할머니가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사악했는지 살아생전에 한 번도 선행을 한 게 없었다. 그래서 이 할머니가 죽었을 때 악마들이 이 할머니를 지옥 불구덩이에 던졌다. 그런데 어느 날 수호천사가 그 지옥 밖을 지나가다 할머니가 불구덩이에서 고생하고 있는 걸 보고서, 너무 불쌍해서 신에게 청을 한다. “저 할머니를 살려주십시오.” 이에 신은 “그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한번이라도 선행을 하였다면 고려를 해보마” 하였다.

수호천사가 할머니 일생을 적은 책을 봤더니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은 “그렇다면 그 양파 한 뿌리를 할머니에게 던져줘라. 그래서 할머니가 그 양파 줄기를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오게 하라”고 이야기한다.

수호천사는 양파 한 뿌리를 할머니에게 던져주고는 조심스레 끊어지지 않게 잡아당겼다. 할머니가 반쯤 지옥에서 빠져 나오고 있을 때였다. 지옥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걸 보고 “나도! 나도!” 하며 매달린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만 구원받으려고 했는데 다 달려드니깐 너무나 화가 나서 “이건 내 양파야! 내 거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다 걷어차 버렸다. 그 순간에 양파는 똑 부러지고 모두 다 같이 지옥불로 다시 돌아갔다.

이 할머니의 죄는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이 할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수호천사가 찾아낸 ‘양파 한 뿌리’는 초라한 선행이었지만, 구원은 수학적 계산을 따르지 않는다. 수호천사의 행동에는 죄 지은 자에 대한 자업자득, 인과응보가 작용하지 않는다. 그저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만 작용했다.

그러나 양파 한 뿌리는 구원의 가능성일 뿐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이 양파 한 뿌리로 천국행 티켓을 샀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다른 죄인들이 매달렸을 때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그들을 발로 걷어찰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의 죄는 선행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단절’시킨 죄이며,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결국 타인을 증오했기 때문에 결국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실천적 사랑을 위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인류를 공멸로 몰아가는 타인과 타집단에 대한 배제를 낳는 증오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사랑’뿐이라고 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알료사가 존경하는 조시마 장로는 두 가지 사랑을 말한다. 공상적/몽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이다. 공상적 사랑은 말로 하는 쉽고 기분 좋은 사랑이며, 사랑한다는 느낌이나 감정이다. 대표적인 게 ‘인류사랑’인데, 그 자체는 멋진 가치이지만, 너무 방대하고 추상적인 사랑이다. 누구나 다 말할 수 있지만 귀찮아지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실천적 사랑은 인류나 거대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서 시작된다. 행동으로, 온 존재로 하는 것이며, 책임과 의무로 하는 사랑이다. 나를 귀찮게 하거나 폐를 끼치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실천적 사랑은 어렵고 때로 중노동이며, 용기이며, ‘견뎌내는 것’이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결국 실천적 사랑은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런 사랑이 결국 나를 완전히 회복시킨다”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기에 ‘완덕’이라 부를 수 있다. 너로부터 시작되는 사랑, 너 속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이며, 이러한 겸손한 ‘우리’만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의 사랑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이미 ‘죽음의 집’에 머무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옥은 더 이상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이 지금 처한 상황이 지옥이며, 이 지옥은 사랑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도로시 데이는 러시아문학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그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많이 열독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배지 생활을 담은 <죽음의 집에 관한 기록>, 그밖에 <학대받는 사람들>, <백치>, <악령>, <미성년>, <도박꾼>, 그리고 가장 유명한 <죄와 벌>. 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고,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죽었다. 그는 임종 직전에 토볼스크에서 폰비지나 부인에게 받았던 성경을 아내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회묘지에 묻었다.

[참고]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2008, 예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석영중, 2015, 예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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