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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버러지 같은 인간이 사라지면 세상은 그만큼 깨끗해질까?도스토예프스키, 혁명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4

죄와 벌, 정의에 관하여

죽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구원’의 문제였고, 구원은 곧 완전한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다. <죄와 벌>은 먼저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인색하고 잔인하고 사악한 전당포 주인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어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해 놓았지만, 백치 같은 여동생에게도 월급을 주지 않고 혹독히 부려먹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사는 그 바퀴벌레 같은 노파를 죽여 그 돈을 빼앗은 다음, 그 돈으로 수백, 수천 명의 선량한 사람을 행복으로 인도하고, 수많은 극빈 가정을 파멸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는 ‘비범한 인간’ 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집필하기 직전에 프랑스 제2제정 황제인 나폴레옹 3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사>를 출간해, 윤리와 도덕률을 초월하는 비범한 인간의 출현을 공공연하게 찬양했다. 니체의 ‘초인사상’에 앞질러 나온 이 이야기는 “비범한 사람에게는 살인을 포함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고결한 이상과 안목을 지닌 엘리트지만 너무 가난해 자존감은 바닥인 상태였다. 그래서 비범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고결한 ‘분배정의’의 대행자로서 추악한 노파/악을 죽이고 선량한 백성을 구원하자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의가 없었다. 늙고 사악한 노파에게는 돈이 넘쳐나고, 착하고 어린 여자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동기는 일차적으로 ‘정의구현’이었다. 실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시빈민들은 한 마디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삶은 심연 위에 걸린 한 가닥 줄 같은 것이었다. 행상인들과 일용직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들과 매춘부들과 좀도둑들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여기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은 당시 유행하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잇닿아 있다. 사악한 인간 한 명을 제거하여 사회 전체의 공리(公利)가 증가된다면 선(善)이라는 논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정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권력과 자존감의 극대화를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러시아문학가인 석영중 교수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의를 위한 행동은 정의로울지 모르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동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모사꾼과 협잡꾼, 음모가와 살인범과 도둑과 강도들이 ‘정의의 이름으로’라는 깃발 뒤에 옹기종기 숨어서 지극히 야비한 개인적 욕심을 충족시킨 사례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석영중)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산술적 공리주의에 반대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정의를 실현한 게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인간성에서 단절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노파를 혐오했다. 그러나 살인 이후에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가난한 자신이 혐오스럽고, 추악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이 혐오스럽고, 그런 사상을 현실화시킨 것이 혐오스럽고, 운명에 질질 끌려 다닌 것이 혐오스럽다. 자신에 대한 이 끝없는 혐오가 외부세계에 투사될 때, 그것은 세상 전체에 대한 사악한 혐오로 복사된다. 이쯤 되면 이미 지옥이 따로 없다. 살인에 대한 벌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은 누구라도 사랑할 수 없으면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는 결국 자신 안에 갇힌 채 살았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전당포 노파는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도 비좁은 공간에 “갇혀서” 모든 창문을 닫고 살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고 차곡차곡 돈만 모으며 살았다. 그녀의 돈은 그녀가 죽은 뒤 수도원에 “사후 추도비용을 위해 기탁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노파는 가난한 이들의 시간을 다 잡아먹고는 자기 혼자서만 이승에서의 삶이 끝나고 저승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꿈을 꾸었다.

노파는 배다른 동생이었던 리자베타도 착취하였다. 지독히 못생긴 서른다섯 살 먹은 리자베타는 백치처럼 신앙심이 깊고 유순하여 늙은 언니가 시키는 대로 온갖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이 불쌍한 여자는 끊임없이 못된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리자베타는 가난하고 모욕당한 사람, 경제적-심리적-성적으로 학대받고 짓밟힌 사람의 상황을 대변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이런 사람들 사이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리자베타까지 죽임으로써 정의의 총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여기서 리자베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표현한 ‘유로지비’(Yurodivy)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바보, 광대, 미치광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음을 들려주는 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상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 인류 구원을 위해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라고 불렸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도 함께 죽인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죄와 벌, 자유로운 인간은 누구인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버러지들이 없어지면 세상은 훨씬 멋지고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표현한 소냐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라고 그에게 묻는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인도 죽는 편이 낫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도 죽는 편이 낫다.

나아가 이런 입장에 서면, ‘인종청소’도 정당화 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덕분에” “...때문에”가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 역시 “...에도 불구하고” 주어진다. 이게 비범한 인간의 초인사상이 넘어설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이다.

“소냐는 비천한 존재일망정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비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겸손하지만 자학하지는 않는다. 아니 겸손하기 때문에 자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버러지가 아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만하기 때문에 자학한다. 극도의 오만과 극도의 자기 비하는 한가지다. 그는 비천한 존재들은 모두 버러지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버러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버러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노파를 죽이듯이 자신도 죽일 수 있는 것이다.”(석영중, <자유-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286쪽)

하찮은 것을 못 보는 사람은 위대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초인과 비범함만을 숭배하기 때문에 나폴레옹 같은 초인들의 막강한 업적만을 인정하고 부러워할 뿐, 소소한 것뿐 아니라 생의 대부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고 아무것도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찮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자유롭지 않은 사람만이 허접한 것과 위대한 것의 목록을 작성하고 가격을 매긴다. 오로지 자유롭지 않은 사람만이 인간을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으로, 위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으로,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평가하고, 가치를 매긴다.”(석영중, 같은 책 315-316쪽)

라스콜리니코프가 구원되는 길은 그러한 구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시간’을 살아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욥기> 강론을 빌어 “과거의 슬픔은 인간생활의 위대한 비밀에 의해 조금씩 고요하고 감동적인 기쁨으로 변하는 것”이라 했다. “피 끓는 젊음 대신에 온화하고 찬란한 노년이 열리기 때문”이라 했다. 여기서 성 바오로의 “항상 기뻐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이 새롭게 들린다. 자식의 죽음과 함께 모든 걸 상실한 아낙네에게도 조시마 장로는 “그냥 슬퍼하라”고 조언한다.

“위안을 얻으려 하지 마시고 우십시오. 단지 울 때마다 당신의 아들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내려다보다가 당신의 눈물을 보고 기뻐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려드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은 어머니의 위대한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여 그 쓰라린 눈물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고요한 위안과 진정한 정화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조시마 장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현재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었다. 이 시간 속에서는 죽음도 노화도 저주가 아닌 축복이며, 인간은 온전히 시간의 속도와 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 시간과 함께 춤을 추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넉넉하고 현재는 언제나 영원이 된다.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쫓지 않았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이옵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 

[참고]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2008, 예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석영중, 2015, 예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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