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그리고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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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그리고 성서
  • 한상봉
  • 승인 2018.04.0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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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혁명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3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인 <죄와 벌>에서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괴로워하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구원의 빗장을 열어준 사람은 러시아 사회의 ‘바닥 생활자’라고 볼 수 있는 창녀 소냐였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단절’(Raskol)이라는 뜻의 어원을 갖고 있다. 살인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에서도 단절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나가서 네거리에 서서 먼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 온 세상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를 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에게 생명을 보내주실 거예요.”

소냐는 경찰서로 가라고 하지 않는다. 먼저 네거리에서 고백하라고 한다, 온 세상에 절을 하며 겸손하게. 그는 새장처럼 비좁은 하숙방에서 나가야 하고, 감옥처럼 좁은 생각에서 나가야 하고, 무덤처럼 차가운 마음에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다시 그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동안 인정할 수 있었던 삶은 아름답고 부유하고 고상하고 지적이고 훌륭하고 멋지고 위대하고 거룩하고 존경스러운 삶이다. 그에게는 잘난 사람만 사람이었다. 그에게 가난하고 추악하고 허름하고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며, ‘벌레’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정작 그를 구원한 것은 그 ‘다른’ 세상과 ‘다른’ 사람에 속한 소냐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직업을 가진, 힘없고 연륜마저 없는 어린 아가씨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버러지들이 다 없어지면 세상은 훨씬 멋지고 깨끗해질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 못난 생명 중 하나가 그를 구원한다.

Beatriz Rojas Novoa

소설 <죄와 벌>을 압축해 놓은 것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요한복음의 ‘나자로 이야기’였다. 그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은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

요한에게 부활은 죽음 후에나 누릴 수 있는 실재가 아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전히 새로운 실존방식을 뜻한다. 나자로가 돌무덤을 열고 나왔듯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마음의 감옥에서 나와서 광장으로 가야 한다.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째 부활한 것처럼,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살인한지 나흘만에 이 구절을 읽어준다. 그리고 나자로가 자신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활한 것처럼, 라스콜리니코프는 누이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소냐의 사랑 덕분에 갱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눈물’이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시베리아 유배지로 가는 길목에 토볼스크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다. 이곳에 일종의 ‘환승감옥’이 있었다. 열흘가량 여기에 머무는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는 생애 가장 중요한 선물을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범 유배지였던 토볼스크에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던 폰비지나 부인과 폴리나 안넨코바 부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 폰비지나 부인은 이 창백한 죄수에게 표지 안쪽에 10루블 지폐를 비밀리에 끼워 넣은 신약성경을 선물했다. 감옥에서는 성경밖에 읽을 수 없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배생활을 하면서 표지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성경책을 읽으면서 성경 속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으로 삼켰다. 그는 이 성경책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유배 이후 페테스부르크로 귀환해서도, 유럽을 떠돌던 시절에도, 임종의 순간에도 이 성경책은 그와 함께 있었다.

[참고]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2008, 예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석영중, 2015, 예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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