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에 가까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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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에 가까운 사랑
  • 한상봉
  • 승인 2018.03.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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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혁명보다 더 뜨거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2

황제의 사형놀이, 그후

상트페테르부르크, 1849년 4월 23일 토요일 새벽 4시, 군인들이 장검을 허리에 차고 방에 들이닥쳤다. “공병 소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체포한다!” 28세의 작가이자 내란음모 용의자로 도스토예프스키는 33명의 다른 엘리트들과 함께 ‘제3부서’(비밀경찰)로 압송되었다.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조직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들은 샤를 푸리에(C. Fourier)와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매료되어 외무성 통역 및 번역요원으로 근무하던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 모여 밤늦게까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며 시국을 논했다. 그들은 낭만적이고 열정적으로 사회개혁을 꿈꾸었지만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수줍고 몽상적인 집단이었다. 1848년 2월혁명으로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피가 축출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러시아 황실은 경악했다.
 

세묘라셰프스키 광장에서 연출된 사형집행극 장면

체제 유지에 위협을 느낀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한 해 전부터 이 모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회원들이 ‘내란음모 혐의’로 연행된 결정적인 계기는 1849년 4월 15일 당대 최고의 불온문서인 비사리온 벨린스키(V. Belinskii)의 <고골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나누어 읽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러시아 당국의 검열을 피해 런던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실린 것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를 공개석상에서 세 번이나 낭독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벨린스키는 고골리가 <친구들과의 왕복서한>에서 관제 러시아정교회와 결탁하여 민중을 교화시키려고 하였다고 비판한다. “정교회는 늘 채찍의 지지자였고 전제주의의 추종자”였다는 것이다. 이어 “당신은 러시아가 자기 구원을 신비주의나 금욕주의나 경전주의가 아니라 문명과 계몽과 인간성의 진보에서 찾았음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페트라셰프스키 그룹은 푸리에와 생시몽, 콩시드랑의 저술을 읽었으며, 특히 에티엔 카베가 쓴 <진정한 그리스도교>(The Real Christianity according to Jesus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등장은 인류 사회에 평등을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말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감동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자신들의 세대와 문명에 알맞게 수정하고 개선하는 일로 여겨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파블로프스키 요새 서쪽에 있는 알렉세예프스키 삼각보 감옥 제9호실에 감금되어 7개월 반 동안 독방생활을 했다. 황제는 이들에게 “4년간의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황제는 괘씸한 젊은이들에게 따끔한 선물을 하나 더 주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순전히 황제의 아이디어로, 정치범에게 사형선고가 언도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죄수들은 12월 22일 세묘라셰프스키 광장의 형장으로 이송되었다. 사격부대가 사형수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북소리에 맞춰 일제사격 명령을 기다렸다. 급기야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에야 황제의 시종무관이 달려와 진짜 선고문을 낭독했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 치는 이 반인륜적인 처형 놀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큰 충격을 입었다. 첫줄에 섰던 사형수 중 하나였던 그리고리예프는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죄수들은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한 달 가까운 여정을 마치고 1850년 1월 23일 시베리아 옴스크의 유형지에 도착해서 1854년 2월 15일까지 “관속에 갇힌 채 생매장당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세미팔란티스크로 이송되어 제7시베리아 보병대대에서 5년 3개월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고, 1859년 12월, 마침내 10년 만에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순수한 이상주의자에서 지옥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단테가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에 가까운 사랑

도스토예프스키가 세묘라셰프스키 광장의 처형대에서 풀려난 직후에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죽음에 임박했던 한 인간이 지은 생명에 관한 찬사가 들어 있다.

“나의 영혼에는 어떠한 고뇌나 악함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것은 위로입니다. 나는 오늘 죽음과 대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고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요. ... 또 나의 심장과 영혼에 스스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삶은 선물이고 행복입니다. 매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찬 한 시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나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다른 형태로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Robert Powell's portrayal of "The Prince of Peace" is truly inspiring and beautiful.

대부분의 19세기 러시아인들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정교 가정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으며, 특히 독실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일요일에는 성찬예배식에 빠짐없이 참례했고, 해마다 삼위일체 성 세르기 수도원으로 순례를 떠났다. 물론 청년기에는 다른 청년들처럼 불신의 시대를 지나가면서 공상적 사회주의에 빠지고 1845년 즈음에는 냉담자가 되었다. 그러나 처형대에서 체험한 ‘초월성에 대한 감각’은 그를 심오한 그리스도교 영성과 접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1868년 질녀 소피야 이바노바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이 있으니, 이는 곧 그리스도란다.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게 아름다운 이 인물의 출현은 결국 무한한 기적이라 할 수 있지.”

더 유명한 구절은 감옥에서 나온 뒤에 폰비지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담겨 있다. 이 편지는 대단한 반어법을 통해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길”이라고 요약한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간혹 완벽한 평화의 순간을 주십니다. 그런 순간이면 저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고, 또 제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제 나름의 신조를 만들어냅니다. 그 신조 안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신성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저는 이 세상에 구세주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하고, 더 인정 많고, 더 이성적이고, 더 용감하고, 더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질투에 가까운 사랑을 품고 중얼거립니다. 그분과 같은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조차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진리 밖에 계심을 내게 증명한다면, 그리고 진리가 진정코 그리스도를 배제한다면, 저는 진리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참고]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2008, 예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석영중, 2015, 예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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