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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피바다 광주, 오월의 예수들[서남동 목사를 기리며] 제사와 밥상공동체, 두 이야기의 합류-3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어이없게도 경제정책의 실패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아버지’ 또는 ‘국민을 배불리 먹고 살게 만든 대통령’이라는 신화에 걸맞지 않게 그의 파멸은 한국경제의 몰락과 함께 한다. 숫자를 읽을 수 있는 눈구멍을 가진 사람이라면 1970년대 후반기의 경제지표나 경제통계를 단 10초만 살펴보아도 박정희정권의 몰락은 경제적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확실히 신뢰하던 부하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된 확실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극심한 빈부의 심화로 인해 1979년 10월 16일에 일어난 부마항쟁이다. 둘째, 그의 딸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패행위다.

 

홍성담 <5월 대동세상-1>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같고도 다른

박정희의 죽음을 예고했던 부마항쟁은 계엄군이 투입되어 사흘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박정희 사후 이듬해 ‘민주화의 봄’을 이어가던 광주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확대계엄령이 발표되면서 항쟁의 불길이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전두환은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학살을 명령했다. 5월 18일과 19일은 베트남전쟁에서 그 잔인무도한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알렸던 대한민국 최정예 공수부대에 의해 광주의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오로지 돌멩이와 화염병을 든 광주시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총검을 든 계엄군에게 저항했다. 광주 도청광장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시민들의 시위는 5월 19일로 벌써 6일째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쯤은 우매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부마항쟁은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사흘 만에 진압되었지만, 오월광주항쟁은 계엄군의 엄청난 학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죽음으로 최후룰 마쳤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의 급속한 산업화는 영남에 집중되었던 반면, 광주와 전라도는 농업중심의 경제 토대를 갖고 있었다. 국내의 가장 큰 항구도시 부산은 물론이고, 마산은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마산자유수출공업단지’가 만들어져 대량의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그곳으로 이동했다. 일본에서 쫓겨난 노동력집중산업과 공해산업 중심으로 산단이 이루어졌다. 하루 노동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도 않아서 ‘수출강국’이라는 미명아래 밤새워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공장들은 퇴근시간과 출근시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일이 끝나면 군대 야전막사나 다름없는 기숙사에 노동자를 집어넣고 밖에서 열쇠를 채웠다. 바로 옆 공장에서 무슨 제품을 생산하는지도 몰랐다.

감히 임금인상을 말할 수도 없었다. ‘먹이고 재워주고 입혀주는’것 만이라도 고맙고, 일 년에 두 번인 추석과 설 명절 때 마다 고향에 가는 차비와 떡값을 받는 것은 더없이 황송했다. 같은 공장이라도 옆 라인에서 근무하는 동료의 이름조차 외울 시간도 없이 일만 했다.

또한 박정희가 정권유지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지역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던 까닭에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기에도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부산과 마산은 급속한 산업화에 의해서 도시공동체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부마항쟁이 사흘 만에 진압되었던 것은 이러한 도시공동체의 쇠퇴와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장성, 담양, 화순, 나주, 순창, 해남, 진도 등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해산물의 경제적 기반으로 광주라는 도시가 이루어졌다. 광주의 골목마다 자취방에는 인근 시골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가득했다. 형제나 친구끼리 자취를 하기도 했지만, 유학 온 손주들의 밥을 해주기 위해 할머니가 함께 입주한 셋방도 많았다.

그래서 가을엔 시골에서 햅쌀과 각종 과일과 풍성한 먹거리가 올라왔고 해안이나 섬에 고향을 둔 학우들의 셋방엔 김과 미역 등등 싱싱한 해산물이 올라왔다. 고향에서 올라온 음식들을 담 너머 서로 나누어 먹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도 광주의 주택가 골목은 농촌공동체의 그림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홍성담 <오월 헌혈>

이제 우리 어른들이 나서서 싸우자

광주에 확대 계엄령이 선포되자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각 대학에 진주했다. 매일 그렇듯이 18일 아침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도서관으로 향하다가 교문을 막고 있는 군인들과 마주쳤다. 계엄군들은 달아나는 학생들을 쫓아 곤죽이 되도록 팼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이 광주시내에 나타났다. 시민들이 피투성이 학생들을 보고 외쳤다.

‘이러다가 우리 자식들이 다 죽겠다. 이제 우리 어른들이 나서서 싸우자’

나는 시민들의 외침 중에서 ‘우리 자식들’이라는 언어에 방점을 찍어 주목한다. 이것은 ‘농촌공동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다.

즉, 광주는 그나마 농촌공동체의 잔영이 남아있어서 그 힘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즉시 ‘도시공동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시민들이 계엄철폐와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를 외치면서 오월항쟁은 본격화 되었다. 계엄군에 의한 타상과 자상 환자가 병원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소총에 착검한 대검으로 계엄군들은 잔혹하게 시민들을 찌르고 베었다.

20일 24시에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소총 발포를 가했다.

이후 더욱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시내 각지에서 도청광장을 향해 진격했다. 시민들의 맨주먹 시위로 수세에 몰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겨우 도청광장만을 지키고 있었다. 도청광장으로 향하는 큰길 4곳은 시위대로 가득했다.

21일 정오를 지나서 12시 50분경에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모두 자세를 바로 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애국가 1절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계엄군들의 집단발포가 무자비하게 시작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만 시민 약 60여명이 사살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날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나주시나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으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결성했다.

계엄군은 시민군과 공방전을 벌이다가 21일 저녁에 광주 밖으로 퇴각했다.

 

홍성담 <사시사철 중 봄>

해방 광주

마침내 광주는 계엄군의 학살을 물리치고 해방되었다. 그러나 광주를 포위한 계엄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계엄군에 의해 유린된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들을 거리에 내놓아서 모두 함께 나누도록 했다. 광주 시내 사방천지에 먹을 것이 넘쳐났다. 시민들이 얼른 요기하라며 시민군의 차량에 올려준 과자와 빵과 음료를, 시민군들이 오히려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길거리마다 솥을 걸고 밥을 지어 서로 나누었다. 오랜 긴장감에 입이 깔깔한 시민군을 위해서 누군가는 솥에 죽을 끓였다.

퇴각하던 계엄군들이 광주시 외곽에서 홧김에 무조건 총질하여 죽인 가축들이 도축되어 리어커에 실려 왔다. 시내 여기저기에서 솥에 고깃국을 끓였다. 말 그대로 광주시내는 거대한 ‘밥상공동체’를 이루었다. 광주시민 전체가 먹고 또 먹어도 남아도는 먹거리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2천년을 건너뛰어 광주도청 광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홍성담 <밥>

사랑은 기적을 만든다

‘사랑’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의식이다. 그래서 사랑은 기적을 만들기도 하고, 또한 영성(靈性)의 기본토대가 된다.

민중의 바다를 떠나 홀로 수행을 통해서 생겨난 영성은 비물질적 실재(實在)나 자신의 존재의 정수(essence)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내적인 길(inner path)로 걸어가서 신비주의나 심령주의의 어두운 동굴에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자연이나 우주와 연결, 또는 합일되는 신비하고 귀한 경험을 얻거나 신성(神性)의 영역과 연결되는 초월적인 경험을 얻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실존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에 어떠한 작용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거룩한 의식을 통해서 자기 몸에 신(神)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타인의 몸 안에 주재하고 계시는 신(神)과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원래의 유일(唯一)했던 신이 해체되어 세상의 만물에 제각각 따로따로 내려온 것을 ‘영성’을 통해 한 조각씩 맞추어서 다시 유일(唯一)해진 신을 각자의 몸 안에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은 인간이 홀로 도달하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다. 민중의 바다 속에서 그들과 똑같이 허우적거리면서 다른 사람들 또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합일되는 동시에 더 커다란 자아(自我)에 이르러 만인과 만물에 깃들어있는 신(神)들이 만나 유일(唯一)해지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말하는 그이의 ‘오병이어’ 퍼포먼스도 ‘밥상공동체’에서 우러나온 ‘사랑’이 아니라면 해석하기가 힘들다.

‘사랑’은 자신이 갖고 있는 귀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거룩한 의식‘이라고 확신한다면 누구나 ’오병이어‘의 그 눈물어린 광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달랑 5개의 빵과 2마리의 물고기가 담긴 광주리를 ’사랑‘으로 충만한 5천명의 민중들에게 돌릴 때, 누구나 광주리 속에 담긴 빵을 집어 들기는커녕 각자 옷소매나 주머니에 꼭꼭 숨겨두었던 빵을 오히려 나보다 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기쁘게 그러나 아무도 몰래 내놓았을 것이다.

예수가 기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기적을 이룬 것이다.

 

홍성담 <오월 혈루 6>

밥상공동체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이전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농촌은 일하는 것 자체가 잔치였다. 어느 한 집의 모내기나 추수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을 전체의 일손이 품앗이로 참여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날은 광 깊숙이 아껴두었던 쌀을 꺼내어 밥을 짓는다. 그리고 이미 한두달 전부터 준비한 나물을 데치고 소금간해서 보관해두었던 생선을 꺼냈다.

애호박을 듬성듬성 썰어넣고 옥파를 뚝뚝 부질러 넣어서 된장만 풀어도 구수한 국이 끓여졌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논 옆 물고랑 여기저기에 자라난 미나리를 낫으로 썩썩 베어다가 뻘밭에서 방금 주워온 망둥어를 어슷어슷 썰어 넣고 초고추장에 버무르면 새콤달콤하고 고소한 회무침에 없었던 밥맛도 금방 살아났다. 생선이나 고기가 없으면 장독에서 송어젓, 황석어젓, 모치젓, 전어젓을 꺼내 빨갛게 숙성된 살을 주욱 찢어서 숟가락에 산처럼 뜬 밥 위에 돌돌 말아 얹고 풋고추와 함께 양껏 벌린 입속에 넣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날은 논밭에서 일을 하는 사람만 밥상에 앉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만 해주는 것도 곧 ‘일’이어서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마을 앞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도 달려와 함께 밥상을 받았다. 코를 흘리는 동생을 업은 아이들도 모두 달려왔다. 일 한 사람이 따로 없고, 오늘은 아퍼서 누워있던 사람이 따로 없고, 온종일 노는 사람이 따로 없이 모두 똑같은 밥상을 받았다.

오늘만큼은 너와 내가 따로 없으니 너의 몸속에 내가 있고 내 몸속에 당신이 있다. 사흘 전에 갈등하고 그저께 분열하고 어제 원망했던 사람들끼리도 오늘은 서로 먹을 것을 권하고 자리를 챙겨주는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가득하다. 이 밥상공동체는 화해와 평화를 가득 떠서 몸 안에 담는 시간이다.

 

홍성담 <오울 사시사철 중 가을>

고립된 피바다, 광주

1980년 오월, 광주로 ‘화려한 휴가’를 나온 계엄군들은 잔혹한 학살범죄를 저질렀다. 소총에 착검한 대검에 복부가 갈라진 시민은 아스팔트 위에 내장을 흘리며 쓰러졌다. 채 소화되지 않은 보리밥 한 알이 검붉은 핏덩이 속에서 찬란한 오월 햇빛을 받고 반짝였다.

아이와 노인과 여성도 학살을 벗어날 수 없었다. M-16 총구를 떠난 총알의 위력은 가공했다. 조준사격에 의해 머리 한쪽이 날아 가버린 청년은 허연 뇌수를 거리위에 쏟았다. 부상자들의 수술을 위해 헌혈을 마치고 병원을 나오는 여고생에게도 어김없이 총알이 날아와 허리가 절단되었다.

도망하다가 벗겨진 신발을 주우려는 아이의 머리통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마을 뒤편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아이를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골목길에서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던 만삭의 임산부는 가슴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임산부의 몸속에서 태아가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을 했다. 동네 어른들이 태아라도 살려보려고 절명한 임산부를 리어커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사거리 길을 막은 계엄군은 비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총구를 어른들의 머리에 겨누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위협했다. 그 사이에 태아는 절명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계엄군은 학살한 시신의 얼굴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대검으로 북북 그어서 붉은 살덩어리를 만들었다. 시신의 얼굴에 페인트를 부어서 두텁게 칠했다. 병원마다 영안실에 시신이 가득했고 병원 로비와 복도는 부상자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쫓아오는 계엄군을 피해 도망하던 시민이 높은 첨탑 교회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으나 누군가가 안에서 커텐을 살짝 젖히고 바라만 볼뿐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쫓아온 계엄군이 문을 두드리는 시민의 등에 대검을 깊숙이 박았다. 교회 첨탑에 갇혀있던 신(神)마저도 학살의 순간을 외면해 버렸다.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는 피바다가 되었다.

이제부터 광주는 계엄군과 싸우는 것을 넘어서서 각자가 고유(固有)한 ‘죽음’과 직면하여 싸워야 했다. 내 고유한 ‘죽음’으로 광주와 시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찰나와 같은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 ‘죽음’에 관해서 사색했다. 한갓,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 이후에 내 영혼은 어디로 갈까. 내가 죽고 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붉은 피와 울음소리가 낭자한 도청광장에서 각자 ‘죽음’과 대면하는 시커먼 고통의 시간이 흘러갔다.

홍성담 <밥> 1987년

오월의 예수들

시민군과 아이들과 여성들과 노인들과 학생들이, 광주 모든 시민들이 거리마다 광장마다 가득 모여서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의식을 통해 ‘우리는 밥을 나누듯이 피를 나누었다’는 차원 이동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속에 당신이 흐르고 당신의 몸속에 내가 흐른다. 당신의 몸속에 주재한 신과 나의 몸속에 주재한 신이 수천수만 겁을 지나 오늘에야 서로 만나서 거룩한 영성으로 우리를 감싼다.

‘오월의 예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서 계엄군들의 광주침공작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미 5월 26일 오후 3시쯤에 그이들은 알고 있었다. 광주로 들어오는 4개의 관문인 서방, 운암동, 백운동, 지원동 외곽을 각각 지키는 시민군 기동타격대에서 외곽을 포위한 계엄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제보가 도청 시민군 본부로 들어왔다. 시민군에겐 탄약이 형편없이 부족했고 당시에 보유한 칼빈 소총이나 M-1 소총으로는 계엄군의 막강한 화력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녁 어둠이 내리면서 계엄군들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제보가 날아왔다. 밤 9시쯤에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들이 도청 대회의장에 모두 모였다. 마지막 회합인 셈이다.

시민군 지도부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어린 학생들과 여성은 총을 놓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늘 밤이 두렵거나, 살아서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서슴없이 집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학생과 여성들이 외쳤다.

“우리는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오늘 도청의 마지막 밤을 형제들과 함께 지킬 것이다”

“아니다. 누군가는 오늘 밤을 기억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최후를 마쳤는지 증언해야 한다. 어린 학생과 여성들은 오늘 이 시간을 꼭꼭 기억한 채 집으로 돌아가라”

모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은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단 한명의 여성이 계단 아래 숨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청에 남았다.

 

홍성담 <오월 나의 이름은>

그들은 철쭉 붉은 꽃으로 피어

27일 0시, 외곽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총소리는 도청본부를 향해서 점점 다가왔다. 계엄군은 새벽 4시에 도청을 완전히 포위하고 약 1만 여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도청 건물로 진입한 계엄군은 이미 죽은 시신에도 화염방사기를 쏘아 확인사살을 했다. 계단 아래 숨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여성은 계엄군에게 생포되어 끌려나왔다. 그녀는 도청광장에서 계엄군의 군홧발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

멀리 동편 하늘이 붉게 열리기 시작했다. 시신들은 쓰레기청소 트럭에 차곡차곡 실려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광주시내 거리마다 장갑차와 군인들이 진주했다.

그날 오전, 집에 갇혀 놀다가 골목을 달려 나온 꼬맹이들이 거리를 지키는 계엄군을 보고 비명을 외치면서 각자 집으로 도망했다.

“으아. 북한 괴뢰군들이닷!”

광주 해방기간 동안에 시민들이 직접 확인해서 기록한 시신 외에 대부분의 ‘오월예수’들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외곽 작은 언덕이나 밭 가장자리 곳곳에 암매장되었다.

이듬해 봄에 아카시아, 라일락, 싸리나무, 철쭉과 진달래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고 밭에는 씨가 뿌려졌다. ‘오월예수’의 영혼이 아카시아나 라일락 향기로 우리를 깨우거나 철쭉 붉은 꽃으로 피어 우리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거나 튼튼한 곡식 줄기를 타고 알곡에 머물렀다.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카시아 그늘아래서 그이의 영혼이 깃든 곡식으로 밥을 지어 ‘밥상공동체’를 만들고 우리들의 몸에 제사를 모신다. (홍성담/2018년)

 

홍성담
판화가, 1984년에 광주오월민중항쟁 연작판화 ‘새벽’을 제작했고, 1989년 평양축전에 '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 이 공동 제작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한국작가, 일본과 동아시아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연작 ‘야스쿠니의 미망’ 전시회 등.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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